삼위일체 관점에서 본, 예수의 디아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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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14:31 교회 소개/칼럼



삼위일체 관점에서 본, 예수의 디아코니아
[326호 커버스토리]
[326호] 2018년 01월 04일 (목) 11:25:06장승익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담임목사  goscon@goscon.co.kr

세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현장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창조와 구속으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로서 온 우주가 그분의 사역지다. 즉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삼위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이신 하나님 안에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완벽한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를 이루시며 존재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은 곧 하나님의 본질이요 그의 사역이다. 창조와 구속 곧 삼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분의 다스림 안에 모든 피조물이 있다. 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는 장애인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장애를 갖고 태어난 동물도 있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기형적 형태의 식물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이 태어남에 대한 신비를 다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삼위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에는 이 모든 것들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어느 피조물 하나 예외 없이 그분의 통치 가운데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으로 침투해 들어오셨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삼위 하나님이 멋들어진 하모니로 이 땅에서 일하시는데, 이것을 삼위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로 설명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은 신비다. 다만 하늘이 땅으로, 우리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기에, 이 일을 가능케 하신 성령에 예민하게 움직일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일하심에 대해 깨어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 육의 몸을 입고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거하셨고, 사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이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땅으로 오셨다. 삼위 하나님의 완벽한 코이노니아는 다른 한 위인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는데, 이러한 구속 사역이 바로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의 디아코니아로 나타난다. 디아코니아 역시 삼위 하나님의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보내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고, 보냄을 받은 분은 성자 하나님이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성령 하나님에 의한 사건이다. 그분이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은 신비다. 하지만 성령에 의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 안에서 이 신비는 부분적으로 드러났다.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의 디아코니아 사역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가 좀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를 알아야 한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무슨 말을 하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사셨는가를 복음서를 통해 살펴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좀 더 선명하게 알게 된다. 하지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의 탄생과 사역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기에 우리 역시 성령에 이끌린 바 되어야 한다. 성령의 다스림 속에 거해야 그나마 신비를 어느 정도 파헤칠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 성자 예수는 성령에 의해 잉태되어 태어났고(마 1:18), 공생애 시작 시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체험했다(마 3:16). 요한복음 14:16에 의하면 예수는 또한 보혜사이다. 누가복음 4:1에 의하면 예수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고 성령에 이끌리셨다. 또한 누가복음 4:18-19에 의하면 예수는 성령의 충만한 임재와 기름부음을 인식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새번역, 이하 새번역)


예수의 디아코니아 사역으로서 하나님 나라 사역은 철저히 성령에 의한 사역임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는 하나님의 충만한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인식한 사역은 곧 성령에 의한 하나님 통치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점에 대해 누가복음 4:18-19이 명확하게 설명한다. 그것은 가난한 사회적 약자에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포로되어 갇힌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여 자유케 하고, 눈먼 시각장애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는 사역이다. 이러한 사역은 주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을 선포하는 사역이다. 이러한 예수의 사역은 육체적 심리적 해방뿐 아니라 정치·사회적 지평으로 확장된 자유와 해방의 선포이다. 이것이 예수의 디아코니아요 삼위 하나님의 디아코니아다.

어떻게 이러한 사역을 예수가 감당할 수 있었는가? 그의 ‘온전한 비움’에서 그 단초를 발견한다. 이 ‘온전한 비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명확한 진술을 빌립보서 2:6이하에서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 2:6-8)


 예수의 ‘온전한 비움’은 종의 형체를 가져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 온전한 비움 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완벽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질 뿐 아니라 세상을 섬김 즉 디아코니아 또한 자발적으로 온전히 그 결실을 맺는다.

예수는 진정한 종으로서 섬기는 자 곧 ‘디아코노스’였던 것이다. 누가복음 22:27에 의하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섬기는 자”라고 말한다. 여기서 섬기는 자로서 예수의 자아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마가복음 10:45은 이렇게 말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섬기는 종으로서 예수의 디아코니아 사역은 곧 하나님의 구속과 창조 사역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의 완벽한 코이노니아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이를 요한일서 1:3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이라고 증언한다. 인간이 성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우리 주와의 코이노니아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삼위 중 한 분인 성자 하나님이신 영생의 말씀으로서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는 것이다(요일 1:2-3). 그러므로 ‘디아코노스’인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가 절묘하게 조우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다.


디아코니아의 본질,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다. 삼위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의 본질 역시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인간이 되실 수 있었고, 또 실제로 인간이 되셨다. 전능하신 창조주요 구속주가 되신 하나님이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장애를 입으셨음을 의미한다. 장애를 입으신 사랑의 하나님은 아들 예수 안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이다.

잠시 상상을 해보자.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장애를 입으셨을까? 아니 인간으로 오신 예수는 어떤 장애를 안고 공생애를 사셨을까? 성경은 이 점에 대해 침묵하기에 우리는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수 없다. 하여 나는 이것을 신비의 영역 안에 두고 싶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예수의 장애를 논한다면 역시 신비의 영역 범주 안에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영적 신비이기에 이성으로는 정확히 간파하기 힘들지만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 신비에 어느 정도 이를 수 있다.

첫째는 예수의 고난이다. 그의 고난과 장애의 연결점은 두 가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구약적 맥락인데, 이것은 이사야서에 나타난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에 기인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 53:3)


이사야서에 나타난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은 그야말로 고통과 슬픔을 몸에 달고 살았고, 병적 장애에 시달리는 종이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이 심부름꾼으로 보낸 하나님의 디아코노스로서 ‘상처 입은 장애인’이었다.

상처 입은 장애인으로서 고난 받는 야훼의 디아코노스 사역의 특징은 무엇인가? 우리는 뒤이어 나오는 5절에서 신비를 발견한다. 종으로서 그분의 섬김 사역은 찔리고, 상처 받고, 징계 받고 그리고 매 맞는 일 이렇게 네 가지로 나타난다. 이러한 그의 디아코니아적 사역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의 네 가지 사역으로 인해 분열과 갈등으로 찢어진 공동체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질병의 장애가 나았다. 이것이 신비다. 신비는 생명과 창조의 영역이다. 신비는 역설의 세계이다. 신비는 이성을 넘어선 세계지만, 이성으로 전혀 이해 불가능한 영역은 아니다. 야훼의 종 자신이 고통과 질병을 친히 담당함으로 고통 받는 약자인 타자와 공동체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생명의 기적을 체험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고난 받고 병들고 연약한 타자와 사회적 약자를 그대로 끌어안는 야훼의 종의 고난, 긍휼과 사랑이 장애를 치유하는 신비를 낳는다.

다른 하나의 맥락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리신 몸을 포함한 그분의 공생애 자체에서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는 장애를 입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이사야서에 나타난 고난 받는 야훼의 종처럼 채찍에 맞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는 슬픔을 당하고 연약한 타자를 향한 긍휼을 몸에 지니셨다. 예수의 긍휼을 나타낸 헬라어가 ‘스프랑크니조마이’로서 타자를 불쌍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 등의 뜻이다(마 9:36; 눅 7:13 참조). 명사 ‘스프랑크논’은 창자, 내장 등 오장육부(행 1:18), 애타는 감정, 마음 등의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고난 받고 병든 타자에 대해 긍휼함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의 오장육부가 움직이고 뒤틀리는 아픔, 곧 장애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마음이 간절하고도 애타게 장애인과 약자를 향해 있어 그들의 모든 것을 그대로 끌어안는 일치감을 갖는 것을 뜻한다. 예수는 장애 입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타자의 모든 것을 그대로 자신의 아픔과 장애로 흡수한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을 품는 것은 장애 입은 성자 예수의 고난의 종으로서의 사역이다.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만나는 수많은 장애인들과 병든 자를 고치셨다는 것이다. 하여 병들고 장애 입은 그 타자는 때로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리고 그가 안수하는 치유의 손길에 의해 고침을 받는다. 하나님 나라가 말로만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병든 자와 장애인들이 치유·회복되는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임하는 것이다. 이것은 메시아로서 타자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갖는 힘이다. 마치 구약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메시아의 통치가 임하면 일어날 놀라운 표징을 예언했던 것이 예수에 의해 이 땅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듣지 못하는 사람이 두루마리의 글을 읽는 소리를 듣고, 어둠과 흑암에 싸인 눈 먼 사람이 눈을 떠서 볼 것이다. 천한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더없이 기뻐하며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사 29:18-19)


이 예언의 말씀을 보면 청각장애인이 들으며, 시각장애인이 보게 되고,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리라고 선포한다. 메시아가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장애인의 회복과 연약한 자들 가운데 임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포함된다. 또 다른 이사야 본문을 살펴보자.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사 35:5-6)


이 본문에서도 메시아가 오면 시각, 청각 그리고 지체장애인 등 각종 장애를 입은 이들이 회복됨을 노래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메시아 시대의 특징이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또 다른 고난 받는 야훼의 종에 대한 본문인 이사야 42:6을 보면 야훼께서 이 고난 받는 종을 유대 백성의 언약과 이방인의 빛으로 삼았음을 약속한다. 이어 7절은 이렇게 약속하고 있다.


네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이다. (사 42:7)


이 약속은 예수에게서 이루어졌다. 예수는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그는 구약 언약을 이루신 분이셨다. 바울은 로마서 15:8에서 예수를 “할례 받은 자들의 종”(디아코노스 테스 페리토메스)으로 말하면서 예수께서 구약 율법을 온전히 이루었음을 선포했던 것이다. 

이사야 42:7은 너무도 유사하게 회복의 의미에서 누가복음 4장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희년의 모습과 일치한다. 이러한 구약 예언이 예수의 공생애 사역 중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위해 마태복음 4:23-24을 보자.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모든 환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과 간질병 환자들과 중풍병 환자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또한 마태복음 9:35-36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의 이 두 본문을 통해 볼 때,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장애인과 병든 자들이 치유, 회복되는 생명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사야서의 예언이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과 섬기는 종으로서 예수의 섬김 사역, 성부 하나님과 성령, 이 삼위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의 결정체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애인, 고통 받는 이들을 치유하신 예수
예수는 마태복음의 사례처럼 불특정 다수의 장애인들을 고쳐주셨을 뿐 아니라, 사역 중 만나는 외롭고 고통 가운데 괴로워하는 그 한 사람을 치유하셨다. 또한 직접 찾아가 그를 고쳐 주시기도 하셨다.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몇 가지 사례가 나타나 있다.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운 38년 된 병자가 대표적이다. 예수는 그 못가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유독 이 38년 된 병자에 주목하고 그에게 다가가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말을 걸고 그를 고치신다. 예수는 못가에 있는 아픈 자와 장애인 중 아마도 이 38년 된 병자가 가장 연약한 자임을 알아챘던 것이다.(요 5:6 참조) 이렇게 예수는 무리 중 가장 연약한 자를 주목한다. 길 가시다가 예수는 시각장애인 거지 바디매오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듣고 그를 부른 후 그의 눈을 뜨게 한다. 마가복음 7:32 이하를 보면 사람들이 예수께 언어/청각장애인을 데려오는데, 예수께서 따로 데리고 가셔서 그의 장애를 고침으로 그는 듣게 되고 말하게 된다. 마가복음 8: 22에는 벳새다에서 시각장애인을 두 번 안수하여 고치기도 했다. 마가복음 9장에서는 정신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의 병을 고치신다(막 9:14-29 참조). 이것이 디아코노스 즉 종으로서 예수의 섬김이다.

예수의 디아코니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병들고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에게 먼저 주목하셨다는 것이고, 저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예수의 섬김을 디아코니아와 연계해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그의 사역이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앓는 사람들의 필요만 채운 것이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심리적으로 소외당한 채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를 환대했고 그들을 찾아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예수의 디아코니아다. 여기에는 당시 주류 사회에서 배제된 채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들 수 있다. 예수는 어린아이들을 안으시고 축복하시면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예수 사역의 중심이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예수의 말은 가히 혁명적이요 급진적이라 할 수 있다. 어린아이 혹은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가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있다는 가르침이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요, 자신을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채 가난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인 작은 자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예수의 환대의 디아코니아를 엿볼 수 있다. 예수는 우리 주위에 병들고 가난한 사회적 약자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요, 그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자신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마 25:31-46 참조). 이를 통해 오늘의 교회가 어떤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디아코니아, 고통받는 모든 이를 사랑하는 삶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부어졌다.(롬 5:5) 성령의 역사 안에서 우리에게 부은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자유케 한다. 성령은 자유의 영이면서 해방의 영이다. 이 자유케 하는 사랑은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사랑이다. 그런데 이 성령의 자유와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 예수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성령의 자유와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소유케 한다(갈 5:6 참조).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써 의의 소망을 기다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삼위 하나님 중 성령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의 디아코니아이다.

율법서인 레위기 19:14을 보면 “청각장애인을 저주해서는 안 되고, 시각장애인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하시면서 이 흐름 속에서 18절에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장애인뿐 아니라 정치적·경제적·사회적·심리적으로 연약한 자 모두가 우리의 이웃이다. 율법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이루어지고(롬 13:10; 갈 5:14 참조), 나아가 서로 짐을 나누어지면서 서로 사랑할 때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게 된다(갈 6:2; 요 13:34-35).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디아코니아 실천을 교회가 감당할 때 세상은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종으로서 사심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마치 주인 대접을 받으며 오히려 높아졌다. 이것을 고린도후서 8:9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더 많이 소유하려는 탐심으로 채워 부자가 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낮아짐과 삼위 하나님의 디아코니아로 인해 부하게 된 우리들이 진정 삼위 하나님의 디아코니아에 공의롭고 풍성히 참여함으로 삼위 하나님에 대해 부요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삼위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예민하게 반응하여 사역하셨듯이(이것이 하나님의 부함이다!), 오늘 우리도 성령 안에서 깨어 그러한 삼위 하나님의 디아코니아처럼 최선을 다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에 참여하는 우리의 부요함이다. 이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장승익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담임목사로, 세계밀알연합 이사와 ISF 이사, 학원복음화협의회 중앙위원이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M.Div.)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Dr. Theol.)를 취득했다. 독일 남부지방한인교회 담임목사, 기독교재독한인교회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2015년 10월, 신학도들과 목회자들, 가나안 성도들을 섬기는 ‘예수 희년과 하나님 나라(예희하) 연구소’를 열었으며, 장신대 겸임교수로도 섬긴다.



*출처 : 복음과 상황 /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