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교회의 공적 신앙과 한국교회 (복음의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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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14:27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독일교회의 공적 신앙과 한국교회
[300호 커버스토리] 복음의 공공성, 시즌2
[300호] 2015년 10월 29일 (목) 15:26:41장승익  goscon@goscon.co.kr

독일교회와 한국교회를 비교하는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쉽지 않은 작업이다. 무엇보다 독일교회와 한국교회 간의 역사와 문화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둘째는 근본적으로 독일은 기독교가 국교이고, 대한민국은 타종교가 자유롭게 어우러진 나라이다. 독일인은 유치원 때부터 대학 가기 전까지 기독교식 종교교육을 받는다. 물론 강요가 아닌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때인 1517년을 기점으로 생각한다면 독일 루터교의 역사는 이제 거의 500년이 된다. 500년의 역사를 거쳐 온 독일 루터교회가 독일사회에서 수행해 온 공적 책임과 신앙을 이제 130년이 된 한국교회와 비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독일교회든 한국교회든 신구약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의 역할을 감당해온 것만큼은 분명하다. 양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하고 듣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양국 교회가 어느 정도로 공적 책임을 감당해 왔는가를 살피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공적 신앙의 성경적 근거와 당위성


창조신앙과 구속신앙을 통해 본 공적 신앙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창조주요 구속주로 소개하신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구속하심으로 출애굽이라는 새로운 창조 사건을 이루셨다. 성경에서 창조와 구속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다. 

창조주요 구속주 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 행위를 단지 이스라엘이나 교회 안에만 제한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뿐 아니라 온 우주 안에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사역은 ‘공적’(public)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주위 열강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원 활동을 수행해 가신 하나님은 그의 아들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다. 이 땅의 교회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행하신 창조와 구원 행위를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계속 감당해 나가라는 위임 명령을 받는다.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제한받지 않듯이 성령의 사역 역시 그러하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늘과 땅을 하나 되게 하신 성령은 교회를 통해 우주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된 교회는 이제 우주적 교회이다.

그렇다면 우주적 교회로서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된 교회는 어떤 신앙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또 살아내야 하는가?

모든 인간은 관계를 맺고 사는 한 ‘공적’(public)이다. 여기에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달리 또 하나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바로 구속주요 창조주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이요 공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공적인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신앙인은, 본질적으로 신앙인이 아니다. 


예수의 사역과 자아 인식을 통해 본 공적 신앙
예수의 동선을 추적해보면 그의 활동이 공적이었음을 알게 된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운집해 있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다. 들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고,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는 베데스다 연못 행각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다. 예수의 치유 사역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여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께 몰려왔고 또 가족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께 왔고 예수는 다 고쳐 주셨다. 

예수의 자아 인식은 어떠한가? 마가복음 10장 45절을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당신의 사역을 섬기는 사역, 그것도 자기 목숨을 내주는 사역으로 인식하고 계셨다. 누가복음 22장 27절에서도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그렇다. 예수는 항상 섬기는 자로 우리 가운데 계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가 이 땅에 오심도 공적이요 그의 생애도 공적이요 그의 죽음과 부활도 모든 인류와 피조물을 위한 공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땅에 탄생한 교회는 예수처럼 공적 사명을 품고 이 땅을 섬기는 존재로 살아내야 할 사명을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공적인 사명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교회의 본질을 통해 본 공적 신앙
교회는 태생적으로 공적(public)이다. 교회의 터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육신에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의 삶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세계와 연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은 ‘공적’(public)인 사건이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공적 신앙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고 거하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생명의 구세주이신 예수에 대한 바른 고백과 그의 길을 걷고자 하는 바른 행함에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공적 신앙과 공적 신학의 출발 역시 하나님, 그리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성경이어야 한다. 교회의 사역 터는 예배당 안의 갇힌 공간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지인 세상이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위한 화해적 죽음이었듯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공적 신앙과 공적 신학 역시 그러해야 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율법서와 예언서를 이해해야 하듯(눅 24:27; 행 28:23 참조), 공적 신앙과 공적 신학 역시 구약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해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의 삶 속에서 구약을 읽는다. 왜냐하면 예수의 삶은 구약 말씀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를 바르게 분별하며 해석해 내기 위해 역시 구약에 대한 깊은 통전적 이해가 필수적이다. 

구약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는 또한 공적 신앙과 공적 신학의 출발이자 시금석이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 이웃과 연동되어 있다. 여기에서 이웃을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인접하고 있는 모든 것의 총칭’으로 정의한다면,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일교회의 공적 신앙과 한국교회의 신앙


독일교회 ‘공적 신앙’의 근거
독일교회는 성경적 신학적 사고에 익숙할 뿐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신학적 토론에도 열려 있다. 얼핏 당연한 얘기 같지만, 독일교회와 달리 한국교회는 이 당연한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한국교회는 적어도 공적 신앙의 측면에서 볼 때 (독일교회에 비해) 반(反)성경적이다. 

적어도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독일교회는 성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어떤 이슈가 생기면 교회가 그 이슈에 대해 성경적 신학적으로 글을 내고 토론을 한다. 놀라운 것은 그다음에 ‘행동’을 한다. 그 행동은 우리나라의 보수 단체가 벌이는 황당한 시위가 아니라 누가 봐도 성경에 근거한 사회적 행동으로, 모든 시민이 동의할 수 있는 행동이다. 독일교회 혹은 시민들이 취하는 행동은 얼핏 진보적인 색채가 강해 보이지만, 기실 그것은 신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일 뿐이다. 

필자가 보기에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공평과 정의를 행하고, 가난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 물질을 즐겨 나누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다. 그들은 소박하고 욕심이 없으며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 오늘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한국교회를 어느 정도나 인정하고 있는가? 


독일교회 공적 신앙의 역사
독일교회는 어느 나라보다도 교회가 감당해야 할 대사회적인 섬김과 봉사 그리고 공평과 정의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세움을 위해 노력하는 나라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올라간다. 

김옥순은 디아코니아 신학을 연구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디아코니아 신학’이라고 명명한다. “디아코니아 신학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섬김과 인간의 세상에 대한 섬김을 직접적으로 결합시킨 것이다. 루터에 따르면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화해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활동으로서 세상에 대한 섬김이며, 하나님은 칭의된 자녀들이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으로 세상의 창조물을 갱신시키는 봉사에로 나아가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김옥순에 의하면, 루터뿐 아니라 마르틴 부처, 츠빙글리, 칼뱅 등에 의한 유럽의 종교개혁은 현대 유럽 복지국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이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된 신앙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유와 물질로 철저히 나누고 섬기는 삶을 실천해야만 한다’는 개혁신앙의 주된 명제를 확고히 붙잡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교회는 다음과 같은 김옥순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이들 국가〔선진복지국가〕에서는 개인의 소득과 소유가 사회구성원들의 행복을 위해 나눠져야 하는 물질로 인식하기에 ‘조세 저항’이라는 말을 듣기가 어려운 것 같다. 하여튼 아주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복지 실천이 신앙인의 자유로부터 나오는 삶으로서 봉사임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디아코니아와 관련해서 나타난 위와 같은 긍정적인 종교개혁의 영향은, 김옥순에 의하면, 대표적인 경건주의자들인 슈페너, 프랑케 그리고 친첸도르프 등의 경건주의 운동으로 이어진다. 특징적인 것은 이 운동이 개인 경건보다는 공동체로 강하게 통합되어 이후 19세기 새로운 각성운동에 영향을 미쳤고, 스위스와 독일에 여러 기관을 세워 조직적으로 디아코니아가 성장하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늘날 독일 개신교 사회봉사국의 모태가 되는 국내선교국을 세운 비혀른(J. H. Wichern, 1808~1881)이 나왔다. 비혀른은 국내선교국과 오늘날 고아원에 해당하는 라우에스 하우스를 세움으로 당시 산업화로 인해 만연한 인구 증가, 이농 현상, 도시화 집중 등으로 인해 생겨난 사회적 빈곤층과 고아 등의 사회·경제적인 위기를 나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비혀른의 디아코니아적인 활동의 신학적 근거는 한마디로 기독론,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으로서의 계시를 붙잡았고, 이것을 믿는 신앙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신앙이고 이러한 행동하는 사회봉사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한다고 비혀른은 생각했다.

비혀른이 살았던 프로이센 정부와 비스마르크 통치의 시대가 지나고 독일은 1, 2차 대전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특히 나치 시대 때 독일의 주교회는 히틀러의 나치에 동조하는 독일그리스도인(Die Deutsche Christen) 운동을 일으키며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즈음에 1934년 5월 31일 카를 바르트를 중심으로 바르멘 선언이 발표되었고, 또한 마르틴 니묄러, 본회퍼 등을 중심으로 한 고백교회(Die Bekennende Kirche)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바르멘 선언과 본회퍼의 글들은 오늘날 독일교회가 공적 신앙을 갖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바르멘 선언의 두 번째 테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뻗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신앙과 삶의 분리 내지는 이중적 가치를 비판한다. 정종훈은 바르멘 선언의 신학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르멘 신학성명서는 민주주의, 교회, 그리고 사회의 정치신학적 통합을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신학성명서는 독일개신교회의 반민주적인 전통을 극복하고,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개신교회의 새로운 관계설정의 기초를 창출하도록 자극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 나치의 시대가 막을 내린 후 독일개신교협의회 지도부는 1945년 10월 18일과 19일 슈투트가르트에 모여 교회와 사회에 성명서를 내놓았다. 이 자리에는 세계교회협의회의 대표자들도 참석하였다. 전쟁 후 독일교회와 시민들은 매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자신들도 전쟁과 나치로 대변되는 제3제국의 피해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지, 어느 누구도 독일 민족과 교회가 저지른 죄악에 대해 책임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슈투트가르트 성명서가 발표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교회는 슈투트가르트 성명서를 ‘슈투트가르트 죄책성명서’ 혹은 ‘슈투트가르트 죄고백’이라고 말한다. 여러 비판이 있긴 하지만, 이 성명서가 갖는 중요한 점은 전쟁 후 독일교회가 공식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는 것이다. 성명서는 독일교회로 인해 “많은 민족들과 국가들이 끝없는 고난”을 당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어 교회는 히틀러 정권하에서 “더 용감하게 고백하지 못했고, 더 진실되게 기도하지 못했고, 더 기쁨으로 신앙하지 못했고, 더 뜨겁게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스스로 고발합니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독일 사회와 교회는 지속적으로 히틀러 정권하에서 독일이 저지른 죄악을 회개하고 자녀들에게 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알리고 교육하는 일에 앞장서왔다.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지 않고 공적으로 ― 영화, 다큐, 교과서, 강연, 저술, 수용소 현장 방문교육 등 ― 드러내면서 공평과 정의의 사회를 일구어 가기 위해 독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위기: 공적 영성의 결여
이학준은 《한국 교회, 패러다임을 바꿔야 산다》(새물결플러스)에서 한국 개신교의 위기를 공적 영성과 윤리의 결여로 보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공적인 영성이 부족하기에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성서해석의 기준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입맛에 맞는 성서 구절을 짜집기하는 식의 과정을 거쳐 결국 설교를 개인의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키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유익과 영광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구하는 기복신앙으로 변질되거나, 사회와 소통할 줄 모르고 자신의 논리를 사회에 그대로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됩니다. 시민사회와 같은 공적 영역에서는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서 거의 무지하거나 무기력한 것이 한국 개신교의 실정입니다.”(30쪽)

이학준은 이어 개신교의 공적 영성의 약화를 가져오는 여러 요인들로 기복주의, 정과 연의 문화로 대변되는 가족주의, 개교회주의, 성장논리와 우상숭배, 교회와 사회의 분리를 초래하는 이분법적인 사고, 이성 경시 사상 그리고 단순논리주의를 들고 있다. 이들은 한국교회가 진정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 되는 것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것들로서, 그 결과 교회는 결국 교회 내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및 사회와 소통되지 않는 지나친 독선으로 치달을 뿐이다. 작금의 한국교회가 딱 이러한 모습이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들로, 독일교회 모습과도 배치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여전히 자신을 합리화하고 사회와 격리 불통하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근본적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공적 신앙 1: 목회자 납세와 관련하여 
근본적으로 모든 시민은 한 국가의 국민인 이상 납세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여기에 목사를 비롯한 그 어떤 종교인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한국교회가 공적인 영역에서 공적 신앙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낼 부분은 세금 영역이 아닌가 생각한다. 

독일교회의 목사 역시 소득이 있는 한 세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독일사회는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독일이 정한 세법에 따라 정당하게 세금을 걷는다. 물론 소득의 제한을 두고 월 소득이 국가가 정한 것에 못 미치면 세금을 면해준다. 

독일 세법은 매우 세밀하고 치밀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모든 국민은 정당하게 소득에 따라 세금을 내고 그에 따른 정당한 대우를 나라로부터 받는다. 즉 세금은 국민에게 복지라는 형태로 돌아간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국가는 모든 공적 영역에서 국민을 위해 복지를 비롯한 정치적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한다. 국민은 공의롭고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국가 역시 공평과 정의의 성경적인 기준에 의해 세금을 관리하고 정책을 수행한다. 정부와 국민 간에 철저한 신용이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독일에서 살았던 20여 년간 세금을 잘못 투자하거나 제멋대로 엉뚱하게 사용한 공무원들은 많지 않았다. 반면 한국은 세금과 관련하여 너무도 많은 불의와 부정부패가 드러난다. 

독일의 경우 수입이 많은 사람은 그 수입에 걸맞게 의료보험을 비롯한 세금을 낸다. 학생은 수입이 없기에 적은 의료보험료를 지불하고 일반인과 다름없는 모든 혜택을 받는다. 소득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의료보험료를 비롯한 세금이 부과된다. 

이 점은 우리나라와는 너무도 대조가 된다. 우리나라는 고소득자가 제대로 세금을 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탈세도 횡행한다. 목회자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만이라도 제대로 자기 소득에 맞게 세금을 정당하게 내면 그 세금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 효율적으로 쓰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인들이 공적 영역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리라 생각된다. 그러니 목사와 교회를 비롯한 우리 그리스도인만이라도 탈세하지 말고 정당하고 정직하게 벌고 공의롭게 세금을 내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공적 신앙 2: 교회의 사유화 극복
교회의 사유화는 분열, 개교회성장주의, 세습 그리고 담임목사 권력 남용에 빌미를 제공한다. 정말 드문 경우지만, 독일교회도 교회 운영위원회와 담임목사 간에 목회관이나 의견차가 있어 심하게 대립하는 경우가 있지만 교회가 갈라지지는 않는다. 독일교회는 철저한 지역교회이기에 청빙을 받은 목사가 나가면 나갔지, 필자가 아는 한 교회의 어려움으로 인해 한 교회가 두 교회로 갈라지는 경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독일교회는 근본적으로 국가교회이면서 주교회의 성격을 띠기에 목사와 교회의 문제는 철저히 그 교회가 속한 주교회에 의해 움직여진다. 물론 지역교회와의 철저한 협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미 오랜 전통을 갖고 있기에 주교회 본부와 각 지역 교회와의 소통은 원활하다. 

독일교회는 한국교회처럼 교회의 사유화나 세습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단점으로는 지역 교회를 부흥 성장시키려는 목회자의 의지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는 개교회 이기주의와 성장이 맞물려 세습 또는 분열로 이어져 대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크다. 이 문제는 지나치게 모든 것이 담임목사에게 편중되어 있어 담임목사의 사례와 목회비 등이 공평하게 책정되지 않는 것과 연결된다. 부교역자들과의 갑을 관계 등도 공적 교회로서의 위상에 맞지 않는다. 반면, 독일교회는 오랜 역사를 두고 형성해 왔기에 교회를 사유화한다는 생각은 없다. 담임목사의 공평하지 않은 지나친 사례나 교회 내 갑을 관계는 독일교회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공적 신앙 3: 공평과 정의를 행함
독일교회의 장점 중 하나가 불의와 부정부패가 없고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행하며 화평케 하는 사역과 환경문제, 핵문제 등에 지속적으로 반응하며 상황에 따라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 왔다는 것이다. 독일교회 안에는 한국교회와 같은 개교회 이기주의와 성장주의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과 재능을 가지고 어려운 이웃들, 난민들과 어려운 나라들을 섬긴다. 

또한 교회나 담임목사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겸손히 행할 뿐이다. 정말 독일 사람들은 겸손하다. 자신들의 행동을 자랑하지 않는다. 권위로서 사람을 부리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얼마나 성경적인가? 하지만 한국교회는 유감스럽게도 정반대다. 

아직까지 한국교회는 사회적으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거나 가난한 이웃들과 난민을 대하는 데 부정적이거나 매우 소극적이다. 이상할 정도로 사회적 이슈에 약하며, 공평과 정의와 관련된 일에 나서는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까지 한다. 해고노동자, 핵발전소, 4대강 문제 등을 외면한다. 환경문제에 관해서도 독일교회와 시민들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노동자 부당 해고와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한국교회는 너무도 편협하고 비겁하고 불의하다. 악과 타협하는 한국교회의 민낯을 보는 것 같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겉핥기식으로 오독한 결과이다. 지극히 개인적 영성과 기복신앙이라는 틀 안에서만 성경을 읽기 때문이다. 사회적 영성의 철저한 결여다.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공적 신앙 4: 평화와 통일의 문제
성경에 많이 나오는 중요한 이슈가 평화와 통일―하나 됨―이다. 구약에서도 평화 곧 샬롬이 중요하고 신약에서 바울은 예수가 곧 평화라고 선포한다.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모든 장벽을 헐고 하나 되게 하셨다고 에베소서는 증언한다. 독일교회는 이러한 신구약 성경의 메시지에 열려 있을 뿐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평화와 통일을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해오고 있다. 오죽하면 그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지대한 관심을 갖겠는가! 인도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독일교회는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 북한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피조세계와의 평화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반면 한국교회는 잘못된 수구 반공 논리에 휩싸여 국민과 성도를 호도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교회가 독일교회처럼 대사회적이고 시대적인 이슈에 제대로 깨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에 진정 깨어 있는 목사가 절실히 요청된다. 


독일교회에서 배울 점

이학준은 한국교회를 결박하고 공적 영성을 저해하는 요소들로 기복주의, 정과 연의 문화로 대변되는 가족주의, 개교회주의, 성장논리와 우상숭배, 교회와 사회의 분리를 초래하는 이분법적인 사고, 이성 경시 사상 그리고 단순논리주의 등을 들었다. 여기에 몇 가지를 추가한다면 잘못된 권위주의, 교회 분열과 세습, 목사의 제자를 만드는 성경공부와 편협한 성경해석, 설교 등이다.  

필자의 20여 년에 걸친 독일 생활과 현지 목회 경험상 독일교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면 독일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이기에 한국교회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가? 공적 신앙의 관점에서 한국교회와 독일교회를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지만, 이 글을 마치면서 간략하게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독일교회는 오랜 역사를 통해 철저히 반성해 왔다. 즉 독일교회는 반성의 역사와 더불어 잘못된 부분을 집요하게 고치며 달려 왔고 그리고 행동했다. 
둘째, 독일교회의 공적 신앙의 역사를 위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 독일교회는 늘 사회적 영성과 책임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경건주의와 디아코니아에 대한 관심, 그리고 히틀러 치하의 제3제국 시절에도 바르멘 선언과 고백교회 운동을 통해 교회가 감당해야 할 대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에 대해 바른 성경 해석과 신학 그리고 행동으로 본을 보였던 경험을 가진 교회이다. 
셋째, 독일교회는 성경을 성경대로 바르게 읽고 해석하고 토론하는 교회이다. 무엇보다 성경을 바르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읽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입과 눈으로만 하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고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읽는다’고 할 수 있다. 

율법서를 읽는다고 가정해 보자. 율법서를 읽으면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힘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계신지 읽을 수 있다. 희년이 율법서에 나타난다. 율법서만 제대로 읽어내도 오늘의 교회가 공공의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예언서 역시 마찬가지다. 예레미야,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미가 등의 예언서를 교회가 제대로 읽으면 오늘날과 같은 참담함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복음서는 또 어떠한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행적과 말씀들을 제대로 읽고 들을 수 있다면 오늘 한국교회가 예수의 길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따를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있다. 

한국교회는 젊은 교회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주일에 교회에 앉아 있는 성도가 적다고 독일교회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자. 주일과 새벽기도에 무수히 많은 성도가 나와 앉아 있다고 마치 한국교회가 대단한 교회라고 말하지 말자. 과연 하나님은 어떤 교회를 원하실까? 

독일교회를 본받아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성경을 읽자. 엉터리 믿음을 훌훌 미련 없이 떨어버리고 성령과 더불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을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실천해보자. 
하나님,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 각주는 인쇄본(통권 제300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주
 

장승익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담임목사로, 세계밀알연합 이사와 ISF 이사, 학복협 중앙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M.Div.)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Dr. Theol.)를 취득했다. 독일 남부지방한인교회 담임목사, 기독교재독한인교회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최근 신학도들과 목회자들, 가나안 성도들을 섬기는 ‘예수 희년과 하나님 나라 연구소’를 열었다. 



*출처 : 복음과 상황 /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