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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예수·희년·하나님 나라를 붙들고 살아오다


예수·희년·하나님 나라를 붙들고 살아오다

[298호 예수·희년·하나님 나라를 붙들고 살아오다]
[298호] 2015년 08월 26일 (수) 15:45:16장승익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담임목사  goscon@goscon.co.kr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이 말씀은 흔히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공생애 첫 설교라고 하는데, 제 목회철학의 뿌리가 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제 목회철학을 이 말씀에서 가져왔는데,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저의 목회와 삶 그리고 신학을 꽉 붙잡고 놔두지 않는 말씀입니다. 저로 하여금 다른 길, 다른 삶을 살지 못하도록 늘 저를 경책하고 감시하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한마디로 목회와 신학에서 제가 바람피지 못하도록 하는 생명의 말씀이기에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희년, 하나님 나라에 사로잡히다
지나간 제 추억을 회상하며 이 말씀과 제 목회철학에 관련된 오래 전 신대원 시절의 이야기 보따리를 먼저 풀어 놓으려 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대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면서부터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신대원 졸업논문 제목을 금요철야기도 중에 “바울의 묵시적 기독론”으로 정했습니다(당시의 금요철야기도는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기도였지요). 기도하는 중에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이 주제가 그야말로 이후 제 삶과 신학에 꽂혔습니다. 신대원 논문이라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논문에서 예수, 묵시, 종말 그리고 역동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큰 얼개를 이루었습니다. 

신대원을 졸업한 해인 1989년 11월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카이로스에 결혼을 하고 이듬해인 1990년 3월에 독일로 유학을 갈 때도 예수와 관련된 기독론을 좀 더 깊이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아내와 함께 독일로 떠났습니다. 

이러한 제 독일 유학은 마치 물흐르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나마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신학을 하면서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유학 가기 전 들어가는 신학석사과정(Th. M)을 마치지 않고 곧장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대로 저는 결혼하자마자 당시 세계적인 신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었던 신약학자 롤로프(J. Roloff) 교수가 있는 에어랑엔 대학으로 갔습니다. 당시만 해도 에어랑엔 대학은 근근이 옛 명성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참고로 신학에서 말하는 구속사학파가 에어랑엔 대학에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 입학을 위한 어학강좌를 들으면서 동시에 나름 강의도 듣고 기독론과 관련된 커다란 주제들, 예를 들면 역사적 예수, 인자, 성만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등의 주제들이 신약성경 각권에서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지 관심을 갖고 책과 논문들을 그야말로 정신없이 흡입하듯이 읽어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주제들이 너무도 방대하고 복잡하구나 하는 생각이 숨이 막히게 콱 와닿았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제들을 연구했고, 셀 수 없을 정도의 단행본과 연구논문들이 그동안 쏟아져 나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독일에 오자마자 서툰 독일어로 몇 년간 출판된 연구논문들과 주요 단행본들을 탐독하면서 느낀 또 한 가지는, 기독론에 관한 연구는 무수히 많은 반면 교회론에 관한 성경신학적 작업은 상대적으로 굉장히 적다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공관복음서나 요한복음의 기독론에 관심을 가졌던 저는 여기에 착상하여 히브리서의 교회론을 저의 박사논문 주제로 써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 각권의 기독론에 관한 책을 읽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히브리서의 대제사장적 기독론과 구원론에 관한 글들을 읽어나갔습니다. 그리하여 히브리서의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 즉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권면·징계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제사장적 기독론과 구원론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결국 히브리서에서 교회론·기독론·구원론·종말론은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으며,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엮어져 오늘의 히브리서라는 탄탄하고 멋진 신학적 작품을 탄생시켰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박사학위논문을 “히브리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 히브리서의 신학과 교회론을 위한 한 기여”라는 제목으로 썼습니다. 

히브리서를 연구하면서 구약성경 중 레위기를 많이 읽고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 희년에 대해 좀 더 선명한 이해를 갖게 되었고, 이 주제는 제 평생의 신학의 화두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밝혔듯이 신학의 길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는 제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한 더 깊은 영적, 신학적, 목회적 이해는 독일 유학 시절 박사논문을 쓰는 과정과 목회의 현장에서 무르익었고, 그 결과 저의 목회와 신학의 두 기둥으로 확실히 자리매김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 보듬은 예수의 공생애를 목회의 근간으로 삼다
유학과 목회를 포함하여 약 20년 6개월을 독일에서 살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중 제 마음에 깊이 남아 지금도 제 목회와 신학에 자양분이 된 체험이 있습니다. 독일 유학 3년째 되던 해인 1992년 여름부터 1994년 여름까지 약 2년여 간 독일 장애인들을 가가호호 방문하며 돌보았던 일입니다. 어쩌다 독일의 개신교 사회봉사국에 속해 있는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각 지역 단체인 디아코니센터에 속해 그들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약 10시간 정도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들을 방문하며 목욕도 시켜드리고, 집 청소, 시장 보기, 음식 준비, 식사 시중, 산책, 말동무 그리고 때로는 대소변까지 모든 일을 두루 챙기는 사역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고독한 장애인들과 함께한 이 2년 동안의 삶은 저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황홀한’ 경험이었고, 이후 30세에 목사 안수를 받아 목회하며 학위논문을 쓰는 과정에 지대한 도전과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때의 경험과 더불어 예수의 삶과 누가복음 4:18~19절 말씀이 지금도 변함없이 제 심장과 신앙 양심을 울립니다.

독일에서 10년째 목회를 하던 어느 날 복음서를 읽는데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말씀들이 갑자기 제 가슴을 못으로 찌르는 듯 강하게 와서 박혔습니다. 말씀들이 마치 혁명을 일으키며 일어나 제게 다가왔다고나 할까요. 마태복음 4:23~24절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아 그렇다! 이런 예수의 삶이야말로 정말 내가 본받고 따라야 할 목회가 아닌가!’ 하는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눈깜짝할 사이에 교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길로 곧장 장애인 선교사역을 하는 유럽밀알에 전화를 걸어 장애인 선교사역에 참여하는 교회가 되기 원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장애인 선교사역에 음으로 양으로 참여하며 섬겨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는 유럽에서의 제 목회와 신학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쳐 특히 유럽의 장애인들과 소외받는 가난한 이웃들과 나그네의 삶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목회란 오직 예수가 하셨던 바로 그 일을 이어 하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물론 신학 작업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신학 역시 예수의 말씀과 삶을 논리적으로 이 세상에 바르게 전하고 설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 짧다고도, 길다고도 할 수 없는 그간의 제 목회와 신학을 생각할 때, 그 중심에 단연 예수와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가능한 한 예수의 말과 인격 그리고 삶을 본받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성도와 동역자와 가난한 이웃을 대하려고 나름 최선을 다하며 달려왔습니다. 오직 예수의 공생애의 삶, 곧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사회적으로 소외당해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하는 그의 삶이 저의 목회와 삶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사회참여적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온 것은 아니지만, 누가복음 4:18~19절이 지금까지 저의 목회와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줄 같은 말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와 하나님의 말씀을 치열하게 붙잡고 씨름하는 목회자와 신학자의 당연한 목회신학적 과제는 희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저의 분명한 확신입니다.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희년의 근본 취지는 자유와 해방이요,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공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여 은혜받은 우리는 이 받은 바 은혜를 널리 전하고 펴야 할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저는 저 자신에게 수없이 묻고 또 묻습니다. 나는 왜 목회를 하는가? 나는 어떠한 설교를 준비하여 성도들에게 선포하는가? 나의 목회와 설교와 신학을 예수께서 지켜보시면서 뭐라고 평가하실까? 사람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 부요한 목회자요 신학자로서의 길을 오롯이 걷는 것이 저의 소신이요 소망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선포하신 누가복음의 이 설교는 예언자로서, 목자로서,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압축해 놓은 말씀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목회하고 신학하며 설교하고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지닌 모든 목회자와 신학자, 그리고 성도라면, 예수의 이 메시지가 자기 삶에 꿈틀거리고 있는지를 잣대 삼아 살아가면 나름 해답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매일의 물음: 예수의 예언과 목회를 따라 사는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지으셨고(잠 14:31; 17:5), 저들의 보호자가 되시며(시 14:6), 예수의 오심이 먼저 그들에게 있었다면, 교회는 당연히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 선포하고 그들의 형편을 돌아보고 보살피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을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남미를 대표하는 멕시코 작가 올리비아 파스는 시(詩)를 가리켜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를 드러내는”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삶이 그러했다고 봅니다. 시인 정호승은 <시인 예수>라는 시에서 예수를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으로 묘사했는데 정말 시인다운 눈으로 예수의 삶을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시인 예수는 현실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가장 현실적이셨고, 또한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만나고 영원과 찰나가 만난다고나 할까요.

탁월한 구약학자였던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예언자들》에서 예언이란 “인간 상황을 하늘의 눈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은 하늘의 눈으로 인간 실존을 주석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구약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누가복음 4:18~19절은 예언인 동시에 예수의 목회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목회자와 신학자는 이러한 예수의 예언과 목회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예수와 상관없는 목회나 예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와 무관한 목회나 예언은 주술이요 종교행위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의 삶의 본질보다는 뿌다구니에 치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늬만 있고 소리만 요란하여 정작 필요한 복음의 능력과 생명력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뿌다구니에 걸려 넘어지듯 이러한 교회와 목회자의 행태로 사람들은 위로와 희망을 얻기보다는 걸려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그야말로 세상으로부터 남우세를 당할 뿐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러한 것 같습니다. 

오늘 교회의 모습은 정말 믿는 우리에게나 믿지 않는 세상에게도 한시름이 되고 있지 않나 합니다. 이 한시름을 과연 어떻게 덜 수 있겠습니까? 저는 누가복음 4:18~19절의 말씀이 그늘진 곳에 비치는 볕뉘와 같아 낡고 습한 곰팡이를 내몰듯이 오늘의 교회와 사회를 어둠에서 건져내고 치유하는 생명수가 되기를 오늘도 조용히 소망해 봅니다.  


장승익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담임목사로, 세계밀알연합 이사와 ISF 이사, 학복협 중앙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M.Div.)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Dr. Theol.)를 취득했다. 독일 남부지방한인교회 담임목사, 기독교재독한인교회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최근 신학도들과 목회자들, 가나안 성도들을 섬기는 ‘예수 희년과 하나님 나라 연구소’를 준비 중에 있다. 




출처 : 복음과 상황 /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