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디모데, 빌레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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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17:42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디모데, 빌레몬서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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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17:40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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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17:37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에베소서, 골로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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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17:34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에베소서, 골로새서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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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17:33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고린도전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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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17:30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고린도전후서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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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17:27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로마서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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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17:22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강의] 바이블아카데미- 바울, 예수의 참 제자인가














건강한 교회의 단상 (2):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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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14:46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건강한 교회의 단상 (2):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  - 2013.6



건강한 교회는 어떠한 교회일까? 건강한 교회의  단상 (1)을 쓴지 거의 1년만에 건강한 교회에 대한 단상 (2)를 쓰게 된다.

단상 1을 쓸 당시에는 머지 않아 나의 최고의 관심사인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 라는 주제로 건강한 교회에 대해 써나가려고 계획을 했었다.

하지만 이 주제는 2013년도 교회 표어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교회"로 정하면서 2013년도 두주에 걸쳐 주제에 관한 설교를 한 후에 그리고

 이 주제를  일곱번에 걸쳐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시리즈 설교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이 주제로 컬럼을 쓸 기회를 놓쳤다.

 물론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로 책도 나온 바 있고 여러 훌륭한 신학자들이 논문이나 단행본의 형태로 쓴 바 있기에 그러한 책들과 논문을 참조하면 그리 급할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한 현실적인 안도감과 더불어 주제에 대한 긴급감도 사라졌기에 차일피일 미루게 되어 여기까지왔다.

  "건강한 교회"라는 화두는 목회자요 신학자인 필자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마치 숙명과도 같은 주제이다.

하여 나의 평생 목회와 신학의 주제가 될 것이다.

 

 건강한 교회란 어떠한 교회일까? 그 중요한 나의 생각의 단초를 다소 거칠게 그리고 어설프게 "건강한 교회에 대한 단상 (1)에 적어 놓았다. 

하지만 잠시 여기에서 단적으로 다시 한번  언급하고 싶은 것은 건강한 교회는 "예수를 머리로 하는 교회 그리고 예수의 마음을 가진 교회"이다.

한마디로 "예수처럼 사는 교회"이다. 나는 여기에 다른 수식어나 미사여구를 붙이고 싶지 않다. 

예수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에 걸맞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철저히 저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항상 예수는 그 곳에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그 일을 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이신 성령과 동행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에 구태여 이름을 붙여 본다면 이를"성령론적 사고"라고 명명하고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동안에 하셨던 모든 말과 행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론적 사고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고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일까? 어디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어낼 수 있을까?

당연히 신구약 성경 66권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있다. 그래도 좀 더 좁혀 보면 구약에서는 예언서에 잘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구약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의 대변자 즉 목소리였던 것이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정치,군사, 경제, 종교, 사회 그리고 문화 등을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재해석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예언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의 삶의 자리를 외면한 채 예언할 수 없었다,

그들의 외침 한 마디 한 마디는 그야말로 인간 실존과 직결된 하나님의 마음결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신약에서는 단연 예수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오롯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깨달아 그 마음에 걸맞는 삶을 살아내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아들 예수의 삶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건강한 교회를 통해 역시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 즉 교회가 어떤 한 목회자나 교회 몇몇 중직자의 생각과 의도대로 움직여 진다면 그 교회는 결코 건강한 교회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교회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는 어떠한 교회일까요?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시사 교회 공동체를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온전히 깨닫고 그 마음에 합하게 살아가는 교회이다.

교회는 성령의 작품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작품이다.

성령론적 사고는 세상을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생각하는 사고요, 또한  이 땅에 교회를 위해 아니 오늘의 당신을 있게 하기 위해 성자 예수가 어떠한 삶을 사셨고 무엇을 하셨는가를 알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교회된 우리가 온전히 복종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사고이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성령에 관한 가르침과 그가 하신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렇게 살아내야 하겠다 라고 생각하며 결심하는 것이 성령론적 사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령론적 사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성령론적 사고 를 하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간략히 살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론적 사고와 교회의 본질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도와 줄 것이다. 그리고 이 성령론적 사고는 이 땅의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만 교회를 이 땅에 탄생케 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르게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 결단과 실천에 대한 소망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첫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공평과 공의를 행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또한 교회가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공평과 공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 차별, 불의와 부정을 몰아냅니다. 모든 사람을 품되 특별히 가난하고 억압의 그늘에 있는 주변인과 사회적 소수자에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하는 사고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이 그러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섬김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순에서 각 마당에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섬김의 삶을 실천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는 당신이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고(막 10,45), 또한 당신을 섬기는 자(눅 22,27)라 말씀하셨습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섬겨야 합니다. 높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낮은 곳에서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건강한 교회는 사람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까지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님께서 만드신 피조세계 자연,동식물 등까지도 보호하고 아끼고 존중할 때 우리는 진정 거듭나는 건강한 하나님의 친백성이 될 것입니다.

성령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를 돌보시는 영입니다.

 

셋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하나되게 하는 삶,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사는 교회입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입니다. 성령은 또한 평화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이간질시키는 생각은 성령의 생각이 아니요, 그것은 어둠의 생각이요 마귀의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그분이 하신 일을 폐하는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상은 한 가족입니다. 나라와 나라가 서로 돕고 섬겨야 합니다. 전쟁 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연습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어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낡은 사고 방식을 우린 이제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다 라는 전인적인 사고를 하며 이 사고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교단과 자역교회 의식을 탈피하여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우주적 교회로서 한 몸 의식을 가짐으로 자연과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진정한 예배공동체의 위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주적인 죽음이요 부활입니다. 성령론적 사고는 이것을 가능케 할 줄 믿습니다.

 

넷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사고를 하는 교회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입니다.

성령은 죽은 자를 살리는 영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을 갖고 죽어가는 영혼과 피조 세계를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교회가 바로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입니다.

흙도 나무도 돌도 물도 온갖 이름모를 잡초까지도 품고 살릴 수 있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되지 않습니까?

 

다섯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사고를 하는 교회입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고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고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연약하 사람, 힘없는 사람, 장애인, 사회적 소수자와 변두리 인생을 살아가는 이 땅의 나그네 등을 따뜻한 사람으로 품는 사고가 바로 성령론적 사고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러한 자가 과거 우리였고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온전히 품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가난합니다. 그는 돈, 명예, 권력, 사람 그밖에 이 세속적인 가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성령은 가난의 영입니다. 하여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영입니다. 예수는 가난하게 오셨고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다 못해 비참하게 십자가 형틀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난 그 자체였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를 부자되게 하시려는 그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그의 친백성된 것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는 부요한 사람인 것을 기억합시다. 더 무엇을 가지려고 하십니까? 무엇이 더 필요한가요? 이제 우리가 할 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나누는 것 밖에 없음을 함께 기억합시다. 그러할 때 예수께서 세상을 풍요롭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부요하게 바꾸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영입니다. 사랑, 나눔, 섬김과 가난은 생명입니다. 생명에 희망이 있습니다. 성령은 생명이기에 성령은 세상에 희망을 부여합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성령론적 사고를 할 때 우리의 일상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은 탄식과 신음을 그치고 기쁨과 평화 가운데에 살아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마을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건강한 교회입니까? 혼자서는 힘이 듭니다. 하지만 "더불어 함께"라면 우리는 기쁨으로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교회창립 15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성령을 그리워해 봅니다. 성령에 사로 잡혀 성령에 매여 성령의 도우심과 이끄심에 순종하는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건강한 예수마을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 드립니다.

지난 15년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자랑스럽습니다.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부활신앙의 제대로된 부활을 생각하며: 예수, 바울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Posted by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2018.04.04 14:46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부활신앙의 제대로된 부활을 생각하며: 예수, 바울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 2013.3



해마다 돌아오는 사순절의 마지막날 토요일 아침입니다. 이제 이 땅의 교회와 모든 피조물은 '탄식 가운데" 내일 부활의 아침을소망과 기쁨 가운데 맞이하게 됩니다. 저는 위의 문장을 쓰면서 "탄식 가운데"에 인용부호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진정 나의 옛자아가 죽었는가에 대한 저의 탄식이요, 우리 인간의 죄악과 탐욕으로 인해 여전히 피조세계가 탄식과 비탄 가운데 죽어가고 있음을 절감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오늘의 시대에 대한 저의 안타까움의 드러남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즈음에서 우리 모두가 진정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참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죽음이 있었기에 그 분이 다시 사신 사실을 톹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찬찬이 시간을 갖고 내가 늘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일상 속에서 내가 여전히 죽지 못하고 여전히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는 그 이기적인 욕망과자기 합리화로 똘똘뭉쳐있어 어느 것으로도 도저히 깨뜨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자아를 정직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힘든 치열한 고민과 성찰 없이는 해마다 맞이하는 주의 부활은 우리에게 아편과 같은 역할만 할 뿐입니다.

 예수의 삶과 선포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지난 7주간 어설프게나마 사랑하는 예수마을 가족들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을  요약한 것을 아래에 실습니다.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온전히 알고 살아가는 사람과 공동체에 참 부활신앙이 정착될 것입니다. 나의 나라 그리고 우리 교회만을 생각하는 성도와 교회에는 진정한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우주적 교회를 지향하며 참 하나님의 백성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주적 죽음이요 그의 부호라 역시 우주적 지평을 가진 부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생각 그리고 삶의 동선의 지평을 넓힙시다. 에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지평이 우주적이듯이 우리의 목회와 신앙생활의 깊이, 높이 그리고 넓이도 우주적 차원까지 승화시켜 피조세계도 우리의 목회와 성도의 교제에 포함시키는 예수의 마음을 간직하며 이 부활과 새 봄을 맞이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1. 예수와 하나님 나라 시리즈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여섯 번에 걸쳐서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생각해 온 하나님의 나라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 통치, 다스림 등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이것이 미치는 영역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로 말미암아 이 땅에 구체적으로 임한 나라이다.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 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예수의 선포와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느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안에 포함된 나라이고 또한 예수의 삶과 선포의 중심이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하고 장애를 입고 고통당하는 연약한 이웃들에게 먼저 임한 나라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하는 나라이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의 나라, 사랑의 나라, 평화의 나라, 기쁨의 나라 그리고 차별과 소외 없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나라이다.

넷째,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시기를 원하셨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이 땅에 확장되고 세워진다. 이 일을 위해 교회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특정한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 가는 나라가 아니다.

다섯째, 예수의 오심, 그의 예루살렘성 입성과 죽으심은 그야말로 초라할 정도로 낮아지고 겸손한 삶 그 자체였다. 말구유에 태어나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공생애 그리고 나귀타고 입성하셔서 결국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의 생애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였고 어떻게 임하는 지를 우리에게 몸으로 보여주신 산 증거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처럼 소리 소문 없이 자라고 번지고 예수와 그 나라의 참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의 헌신과 섬김으로 세워지는 나라이다.

여섯째,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일상과 삶 전체 그리고 공동체에 인격적으로 임하는 나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피조세계에 임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일곱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로 말미암아 이미 이 땅에 도래했지만 여전히 진행 중이다. 즉 완성은 아직 아니다.

여덟째, 하나님의 나라의 전파와 세움을 방해하는 끊임없는 악의 세력과 유혹이 있다. 어떻게 극복하고 견뎌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수 있을 것인가? 성령의 도움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삶을 집요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묵상해야 할 것이다.


2. 예수, 바울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행 1,1-3; 14,22; 28,30-31)


사도행전 1,1-3절에서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께서도 여전히 그가 공생애 동안에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고 전파했음을 알리고 있다. 즉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을 잇는 가장 핵심 주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의 구속적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땅에 도래한 것이다.

바울은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권면한다 (행 14,22). 그렇다! 하나

 님의 나라는 고난 없이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이다. 예수의 삶 그 자체가 좁은 길이었고 양의 문으로서 자기 자신을 계시한 예수의 그 문은 바로 좁은 문이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만이 멸망으로 가지 않고 생명으로 인도될 수 있고 풍성한 생명의 꼴을 우리 주 예수로부터 얻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설교했다(행 28,30-31).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삶과 메시지의 중심일 뿐 아니라 바울 사도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의 중심 메시지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사도적 전승을 이은 오늘의 교회의 삶과 선포의 중심도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a. 오늘 당신의 삶속에서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가 어떻게 적용되어질 수 있겠는가?

b.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를 좀 더 넓혀 우리의 일상 즉 사회, 경제와 정치 분야에서 어떻게 이해하며 실천해 나갈 수 있을지 이야기 해보자.

c. 예수의 십자가의죽음과 부활은 우주적 지평 속에 있는 죽음이요 부활입니다.  특별히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야기 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