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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장승익 목사의 목회 철학: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

장승익 목사의 목회 철학: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눅 4,18-19절 말씀으로 흔히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공생애 첫 설교라고 하지요. 이 말씀은 저의 목회철학의 뿌리가 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저의 목회철학을 이 말씀에서 가져 왔는데,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저의 목회와 삶 그리고 신학을 꽉 붙잡고 놔두지 않은 말씀입니다. 저로 하여금 다른 길, 다른 삶을 살지 못하도록 늘 저를 경책하고 감시하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한 마디로 저로 하여금 목회와 신학에서 바람피지 못하도록 하는 생명의 말씀이기에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신학의 길에 처음 접했을 때부터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는 저의 주요 관심사이었지요.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보다 깊은 영적, 신학적 그리고 목회적 이해는 독일 유학 시절 박사논문을 쓰는 과정과 목회의 현장에서 좀 더 무르익었고, 이후 저의 목회와 신학의 두 기둥으로 확실히 자리매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 유학과 목회를 포함해 약 20년 6개월 독일에서 살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지요. 그 중 제 마음에 깊이 남아 지금도 저의 목회와 신학에 자양분이 된 체험은 독일로 유학 온지 3년째 되던 해인 1992년 여름부터 1994년 여름까지 약 2년 정도 독일 장애인을 가가호호 방문하며 그들을 돌보던 일을 했던 일이었습니다. 소위 독일의 개신교 사회 봉사국에 속해 있는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각 지역 단체인 "디아코니 센터"에 속해 그들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약 10시간 정도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들을 방문하며 목욕도 씻겨 드리고, 집청소, 시장 보는 것, 음식을 준비하고, 음식을 먹여 드리고, 산책, 말동무 그리고 때로는 대, 소변까지도 일일이 살피는 일이었지요.


 가난하고 병들고 고독한 장애인들과 함께 했던 이 2년 동안의 삶은 저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황홀한"경험이었고, 이후 30살에 목사 안수 받아 목회하며 학위논문을 쓰는 과정에 지대한 도전과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목회하며 신학하면서 그 때의 경험과 더불어 예수의 삶과 눅 4,18-19절의 말씀이 저의 심장과 신앙 양심을 울리곤 한답니다.


 독일에서 10년 동안 목회를 하던 중 어느 날 복음서를 읽는 데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말씀들이 갑자기 저의 가슴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말씀들이 마치 반란을 일으키며 일어나 저에게 다가왔다고나 할까요. 마 4장 23-24절이 더욱 그러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아 그렇다! 이런 예수의 삶이야말로 정말 내가 본받고 따라야 할 목회가 아닌가! 라는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교차된 듯한 순간이었지요.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는 유럽에서의 저의 목회와 신학함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쳐 특히 유럽 안에 있는 장애인들과 소외받는 가난한 소수의 이웃들과 나그네의 삶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목회는 오직 예수가 하셨던 바로  그 일을 이어 하는 것이라고 확신했지요. 물론 저의 신학적인 작업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신학 역시 예수의 말과 삶을 논리적으로 이 세상에 바르게 전하고 설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 짧지도 길다고도 할 수 없는 지나 간 저의 목회와 신학의 중심을 생각할 때 그 중심에 단연 예수와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가능한 한 예수의 말과 인격 그리고 그의 삶을 본받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성도를 대하고 동역자를 대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대하려고 나름 최선을 다하며 달려왔습니다. 강의를 하면서도 학생들을 대할 때도 교수라는 권위를 내려놓고 그들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대화하며 함께 식사하며 그들의 삶의 문제와 이야기들을 듣기 위해 노력을 해오곤 했지요.


 오직 예수와 관련하여 그의 공생애의 삶 즉 가난한 자, 병든 자와 사회적으로 소외당해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하는 예수의 삶은 저의 목회와 삶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굉장히 사회참여적으로 활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눅 4,18-19절의 말씀이 지금까지 저의 목회와 삶을 지탱해 주는 생명줄과 같은 말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와 하나님의 말씀을 치열하게 붙잡고 씨름하는 목회자와 신학자의 당연한 목회신학적 과제는 희년이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저의 분명한 확신입니다.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희년의 근본 취지는 자유와 해방이요 더불어 함께 행복하게 사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공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여 은혜받은 우리는 이 받은 바 은혜를 널리 전하고 펴야 할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저는 저 자신에게 수없이 묻고 또 묻습니다. 나는 왜 목회를 하는가? 나는 어떠한 설교를 준비하여 성도들에게 선포하는가? 나의 목회와 설교와 신학을 예수께서 지켜보시면서 뭐라고 평가하실까? 사람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대해 진정 부요한 목회자요 신학자로서의 길을 오롯이 걷는 것이 저의 소신이요 소망입니다.   


 예수의 이 나사렛에서의 설교는 예언자로서 목자로서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의 사역을 압축해 놓은 말씀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목회하고 있고 신학하고 있고 설교하고 있고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물음을 갖는 모든 목회자, 신학자 그리고 성도들은 '자신의 삶에서 이 예수의 메시지가 꿈틀거리고 있는가' 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살아가면 나름 그 해답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지으셨고(잠 14,31; 17,5) 저들의 보호자가 되시고(시 14,6) 예수의 오심이 먼저 그들에게 있었다면, 교회는 단연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 선포하고 그들의 형편을 돌아보고 보살피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을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남미를 대표하는 멕시코의 작가 올리비아 파스는 시를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를 드러내는"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삶이 그러했다고 봅니다. 시인 정호승은 "시인 예수"라는 제목의 시에서 예수를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으로 묘사했는데 정말 시인다운 눈으로 예수의 삶을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네요. 시인 예수는 현실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가장 현실적이셨고 또한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만나고 영원과 찰나가 만난다고나 할까요.


 탁월한 구약학자였던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그의 책 "예언자들"에서 예언이란 "인간 상황을 하늘의 눈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은 하늘의 눈으로 인간 실존을 주석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구약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가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눅 4,18-19절은 예언인 동시에 예수의 목회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목회자와 신학자는 이러한 예수의 예언과 목회를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와 상관없는 목회나 예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술이요 종교행위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의 삶의 본질보다는 뿌다구니에 불과한 것에 치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무늬만 있고 소리만 요란하여 정작 필요한 복음의 능력과 생명력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뿌다구니에 걸려 넘어지듯 교회와 목회자의 이러한 행태로 사람들은 위로와 희망을 얻기 보다는 걸려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그야말로 세상으로부터 남우세를 당할뿐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러한 것 같습니다. 


 오늘 교회의 모습은 정말 믿는 우리에게나 믿지 않는 세상에게도 한시름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누가 무엇이 이 한시름을 덜 수 있겠는가? 

 나는 눅 4,18-19절의 말씀이 그늘진 곳에 비치는 볕뉘와 같아 낡고 습한 곰팡이를 내몰듯이 오늘의 교회와 사회를 어둠에서 건져내고 치유하는 생명수가 될 줄 맏습니다. 나가서 말씀을 전하는 선교적 중요하지만 선교와 더불어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행위가 없다면 말만 무성한 공허한 선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마태복음 25장 31-46절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5장 40절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의 말씀과 45절의 말씀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는 두 개의 말씀을 교회는 준엄한 심판주 예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약 2장과 요일 3장에 나오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가 복음 선포와 함께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교회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세상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세상은 교회를 보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나아갑니다.

 이 거룩하고 위대한 사명을 하나님은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예수의 길을 걸을 때만이 교회는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금년에 ”예수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라는 주제를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화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바이지만 어떻게 그 평화를 일구어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 길이 분명히 보입니다. 십자가의 지혜에 그 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내려놓고 양보하고 약함을 취할 때 세상과 우리 주변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20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