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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건강한 교회의 단상 (2):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

건강한 교회의 단상 (2):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  - 2013.6



건강한 교회는 어떠한 교회일까? 건강한 교회의  단상 (1)을 쓴지 거의 1년만에 건강한 교회에 대한 단상 (2)를 쓰게 된다.

단상 1을 쓸 당시에는 머지 않아 나의 최고의 관심사인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 라는 주제로 건강한 교회에 대해 써나가려고 계획을 했었다.

하지만 이 주제는 2013년도 교회 표어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교회"로 정하면서 2013년도 두주에 걸쳐 주제에 관한 설교를 한 후에 그리고

 이 주제를  일곱번에 걸쳐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시리즈 설교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이 주제로 컬럼을 쓸 기회를 놓쳤다.

 물론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로 책도 나온 바 있고 여러 훌륭한 신학자들이 논문이나 단행본의 형태로 쓴 바 있기에 그러한 책들과 논문을 참조하면 그리 급할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한 현실적인 안도감과 더불어 주제에 대한 긴급감도 사라졌기에 차일피일 미루게 되어 여기까지왔다.

  "건강한 교회"라는 화두는 목회자요 신학자인 필자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마치 숙명과도 같은 주제이다.

하여 나의 평생 목회와 신학의 주제가 될 것이다.

 

 건강한 교회란 어떠한 교회일까? 그 중요한 나의 생각의 단초를 다소 거칠게 그리고 어설프게 "건강한 교회에 대한 단상 (1)에 적어 놓았다. 

하지만 잠시 여기에서 단적으로 다시 한번  언급하고 싶은 것은 건강한 교회는 "예수를 머리로 하는 교회 그리고 예수의 마음을 가진 교회"이다.

한마디로 "예수처럼 사는 교회"이다. 나는 여기에 다른 수식어나 미사여구를 붙이고 싶지 않다. 

예수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에 걸맞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철저히 저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항상 예수는 그 곳에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그 일을 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이신 성령과 동행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에 구태여 이름을 붙여 본다면 이를"성령론적 사고"라고 명명하고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동안에 하셨던 모든 말과 행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론적 사고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고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일까? 어디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어낼 수 있을까?

당연히 신구약 성경 66권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있다. 그래도 좀 더 좁혀 보면 구약에서는 예언서에 잘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구약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의 대변자 즉 목소리였던 것이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정치,군사, 경제, 종교, 사회 그리고 문화 등을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재해석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예언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의 삶의 자리를 외면한 채 예언할 수 없었다,

그들의 외침 한 마디 한 마디는 그야말로 인간 실존과 직결된 하나님의 마음결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신약에서는 단연 예수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오롯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깨달아 그 마음에 걸맞는 삶을 살아내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아들 예수의 삶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건강한 교회를 통해 역시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 즉 교회가 어떤 한 목회자나 교회 몇몇 중직자의 생각과 의도대로 움직여 진다면 그 교회는 결코 건강한 교회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교회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는 어떠한 교회일까요?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시사 교회 공동체를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온전히 깨닫고 그 마음에 합하게 살아가는 교회이다.

교회는 성령의 작품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작품이다.

성령론적 사고는 세상을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생각하는 사고요, 또한  이 땅에 교회를 위해 아니 오늘의 당신을 있게 하기 위해 성자 예수가 어떠한 삶을 사셨고 무엇을 하셨는가를 알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교회된 우리가 온전히 복종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사고이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성령에 관한 가르침과 그가 하신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렇게 살아내야 하겠다 라고 생각하며 결심하는 것이 성령론적 사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령론적 사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성령론적 사고 를 하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간략히 살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론적 사고와 교회의 본질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도와 줄 것이다. 그리고 이 성령론적 사고는 이 땅의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만 교회를 이 땅에 탄생케 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르게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 결단과 실천에 대한 소망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첫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공평과 공의를 행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또한 교회가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공평과 공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 차별, 불의와 부정을 몰아냅니다. 모든 사람을 품되 특별히 가난하고 억압의 그늘에 있는 주변인과 사회적 소수자에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하는 사고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이 그러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섬김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순에서 각 마당에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섬김의 삶을 실천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는 당신이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고(막 10,45), 또한 당신을 섬기는 자(눅 22,27)라 말씀하셨습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섬겨야 합니다. 높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낮은 곳에서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건강한 교회는 사람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까지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님께서 만드신 피조세계 자연,동식물 등까지도 보호하고 아끼고 존중할 때 우리는 진정 거듭나는 건강한 하나님의 친백성이 될 것입니다.

성령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를 돌보시는 영입니다.

 

셋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하나되게 하는 삶,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사는 교회입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입니다. 성령은 또한 평화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이간질시키는 생각은 성령의 생각이 아니요, 그것은 어둠의 생각이요 마귀의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그분이 하신 일을 폐하는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상은 한 가족입니다. 나라와 나라가 서로 돕고 섬겨야 합니다. 전쟁 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연습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어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낡은 사고 방식을 우린 이제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다 라는 전인적인 사고를 하며 이 사고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교단과 자역교회 의식을 탈피하여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우주적 교회로서 한 몸 의식을 가짐으로 자연과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진정한 예배공동체의 위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주적인 죽음이요 부활입니다. 성령론적 사고는 이것을 가능케 할 줄 믿습니다.

 

넷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사고를 하는 교회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입니다.

성령은 죽은 자를 살리는 영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을 갖고 죽어가는 영혼과 피조 세계를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교회가 바로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입니다.

흙도 나무도 돌도 물도 온갖 이름모를 잡초까지도 품고 살릴 수 있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되지 않습니까?

 

다섯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사고를 하는 교회입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고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고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연약하 사람, 힘없는 사람, 장애인, 사회적 소수자와 변두리 인생을 살아가는 이 땅의 나그네 등을 따뜻한 사람으로 품는 사고가 바로 성령론적 사고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러한 자가 과거 우리였고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온전히 품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가난합니다. 그는 돈, 명예, 권력, 사람 그밖에 이 세속적인 가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성령은 가난의 영입니다. 하여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영입니다. 예수는 가난하게 오셨고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다 못해 비참하게 십자가 형틀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난 그 자체였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를 부자되게 하시려는 그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그의 친백성된 것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는 부요한 사람인 것을 기억합시다. 더 무엇을 가지려고 하십니까? 무엇이 더 필요한가요? 이제 우리가 할 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나누는 것 밖에 없음을 함께 기억합시다. 그러할 때 예수께서 세상을 풍요롭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부요하게 바꾸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영입니다. 사랑, 나눔, 섬김과 가난은 생명입니다. 생명에 희망이 있습니다. 성령은 생명이기에 성령은 세상에 희망을 부여합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성령론적 사고를 할 때 우리의 일상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은 탄식과 신음을 그치고 기쁨과 평화 가운데에 살아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마을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건강한 교회입니까? 혼자서는 힘이 듭니다. 하지만 "더불어 함께"라면 우리는 기쁨으로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교회창립 15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성령을 그리워해 봅니다. 성령에 사로 잡혀 성령에 매여 성령의 도우심과 이끄심에 순종하는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건강한 예수마을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 드립니다.

지난 15년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자랑스럽습니다.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