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교회의 단상 (2):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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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14:46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건강한 교회의 단상 (2):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  - 2013.6



건강한 교회는 어떠한 교회일까? 건강한 교회의  단상 (1)을 쓴지 거의 1년만에 건강한 교회에 대한 단상 (2)를 쓰게 된다.

단상 1을 쓸 당시에는 머지 않아 나의 최고의 관심사인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 라는 주제로 건강한 교회에 대해 써나가려고 계획을 했었다.

하지만 이 주제는 2013년도 교회 표어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교회"로 정하면서 2013년도 두주에 걸쳐 주제에 관한 설교를 한 후에 그리고

 이 주제를  일곱번에 걸쳐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시리즈 설교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이 주제로 컬럼을 쓸 기회를 놓쳤다.

 물론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로 책도 나온 바 있고 여러 훌륭한 신학자들이 논문이나 단행본의 형태로 쓴 바 있기에 그러한 책들과 논문을 참조하면 그리 급할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한 현실적인 안도감과 더불어 주제에 대한 긴급감도 사라졌기에 차일피일 미루게 되어 여기까지왔다.

  "건강한 교회"라는 화두는 목회자요 신학자인 필자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마치 숙명과도 같은 주제이다.

하여 나의 평생 목회와 신학의 주제가 될 것이다.

 

 건강한 교회란 어떠한 교회일까? 그 중요한 나의 생각의 단초를 다소 거칠게 그리고 어설프게 "건강한 교회에 대한 단상 (1)에 적어 놓았다. 

하지만 잠시 여기에서 단적으로 다시 한번  언급하고 싶은 것은 건강한 교회는 "예수를 머리로 하는 교회 그리고 예수의 마음을 가진 교회"이다.

한마디로 "예수처럼 사는 교회"이다. 나는 여기에 다른 수식어나 미사여구를 붙이고 싶지 않다. 

예수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에 걸맞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철저히 저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항상 예수는 그 곳에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그 일을 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이신 성령과 동행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에 구태여 이름을 붙여 본다면 이를"성령론적 사고"라고 명명하고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동안에 하셨던 모든 말과 행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령론적 사고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고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일까? 어디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어낼 수 있을까?

당연히 신구약 성경 66권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있다. 그래도 좀 더 좁혀 보면 구약에서는 예언서에 잘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구약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의 대변자 즉 목소리였던 것이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정치,군사, 경제, 종교, 사회 그리고 문화 등을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재해석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예언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의 삶의 자리를 외면한 채 예언할 수 없었다,

그들의 외침 한 마디 한 마디는 그야말로 인간 실존과 직결된 하나님의 마음결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신약에서는 단연 예수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오롯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깨달아 그 마음에 걸맞는 삶을 살아내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아들 예수의 삶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건강한 교회를 통해 역시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 즉 교회가 어떤 한 목회자나 교회 몇몇 중직자의 생각과 의도대로 움직여 진다면 그 교회는 결코 건강한 교회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된 교회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는 어떠한 교회일까요?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시사 교회 공동체를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온전히 깨닫고 그 마음에 합하게 살아가는 교회이다.

교회는 성령의 작품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작품이다.

성령론적 사고는 세상을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생각하는 사고요, 또한  이 땅에 교회를 위해 아니 오늘의 당신을 있게 하기 위해 성자 예수가 어떠한 삶을 사셨고 무엇을 하셨는가를 알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교회된 우리가 온전히 복종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사고이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성령에 관한 가르침과 그가 하신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렇게 살아내야 하겠다 라고 생각하며 결심하는 것이 성령론적 사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령론적 사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성령론적 사고 를 하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 간략히 살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론적 사고와 교회의 본질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도와 줄 것이다. 그리고 이 성령론적 사고는 이 땅의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만 교회를 이 땅에 탄생케 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르게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 결단과 실천에 대한 소망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첫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공평과 공의를 행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또한 교회가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공평과 공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 차별, 불의와 부정을 몰아냅니다. 모든 사람을 품되 특별히 가난하고 억압의 그늘에 있는 주변인과 사회적 소수자에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하는 사고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이 그러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섬김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순에서 각 마당에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섬김의 삶을 실천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는 당신이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고(막 10,45), 또한 당신을 섬기는 자(눅 22,27)라 말씀하셨습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섬겨야 합니다. 높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낮은 곳에서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건강한 교회는 사람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까지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님께서 만드신 피조세계 자연,동식물 등까지도 보호하고 아끼고 존중할 때 우리는 진정 거듭나는 건강한 하나님의 친백성이 될 것입니다.

성령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를 돌보시는 영입니다.

 

셋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하나되게 하는 삶,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사는 교회입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입니다. 성령은 또한 평화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이간질시키는 생각은 성령의 생각이 아니요, 그것은 어둠의 생각이요 마귀의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그분이 하신 일을 폐하는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상은 한 가족입니다. 나라와 나라가 서로 돕고 섬겨야 합니다. 전쟁 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연습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어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낡은 사고 방식을 우린 이제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다 라는 전인적인 사고를 하며 이 사고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교단과 자역교회 의식을 탈피하여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우주적 교회로서 한 몸 의식을 가짐으로 자연과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진정한 예배공동체의 위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주적인 죽음이요 부활입니다. 성령론적 사고는 이것을 가능케 할 줄 믿습니다.

 

넷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사고를 하는 교회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입니다.

성령은 죽은 자를 살리는 영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을 갖고 죽어가는 영혼과 피조 세계를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교회가 바로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입니다.

흙도 나무도 돌도 물도 온갖 이름모를 잡초까지도 품고 살릴 수 있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되지 않습니까?

 

다섯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사고를 하는 교회입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한 사고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고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연약하 사람, 힘없는 사람, 장애인, 사회적 소수자와 변두리 인생을 살아가는 이 땅의 나그네 등을 따뜻한 사람으로 품는 사고가 바로 성령론적 사고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러한 자가 과거 우리였고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온전히 품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교회(성도)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가난합니다. 그는 돈, 명예, 권력, 사람 그밖에 이 세속적인 가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성령은 가난의 영입니다. 하여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영입니다. 예수는 가난하게 오셨고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다 못해 비참하게 십자가 형틀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난 그 자체였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를 부자되게 하시려는 그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그의 친백성된 것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는 부요한 사람인 것을 기억합시다. 더 무엇을 가지려고 하십니까? 무엇이 더 필요한가요? 이제 우리가 할 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나누는 것 밖에 없음을 함께 기억합시다. 그러할 때 예수께서 세상을 풍요롭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부요하게 바꾸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영입니다. 사랑, 나눔, 섬김과 가난은 생명입니다. 생명에 희망이 있습니다. 성령은 생명이기에 성령은 세상에 희망을 부여합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성령론적 사고를 할 때 우리의 일상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은 탄식과 신음을 그치고 기쁨과 평화 가운데에 살아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마을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건강한 교회입니까? 혼자서는 힘이 듭니다. 하지만 "더불어 함께"라면 우리는 기쁨으로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교회창립 15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성령을 그리워해 봅니다. 성령에 사로 잡혀 성령에 매여 성령의 도우심과 이끄심에 순종하는 성령론적 사고를 하는 건강한 예수마을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 드립니다.

지난 15년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자랑스럽습니다.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부활신앙의 제대로된 부활을 생각하며: 예수, 바울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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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14:46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부활신앙의 제대로된 부활을 생각하며: 예수, 바울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 2013.3



해마다 돌아오는 사순절의 마지막날 토요일 아침입니다. 이제 이 땅의 교회와 모든 피조물은 '탄식 가운데" 내일 부활의 아침을소망과 기쁨 가운데 맞이하게 됩니다. 저는 위의 문장을 쓰면서 "탄식 가운데"에 인용부호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진정 나의 옛자아가 죽었는가에 대한 저의 탄식이요, 우리 인간의 죄악과 탐욕으로 인해 여전히 피조세계가 탄식과 비탄 가운데 죽어가고 있음을 절감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오늘의 시대에 대한 저의 안타까움의 드러남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즈음에서 우리 모두가 진정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참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죽음이 있었기에 그 분이 다시 사신 사실을 톹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찬찬이 시간을 갖고 내가 늘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일상 속에서 내가 여전히 죽지 못하고 여전히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는 그 이기적인 욕망과자기 합리화로 똘똘뭉쳐있어 어느 것으로도 도저히 깨뜨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자아를 정직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힘든 치열한 고민과 성찰 없이는 해마다 맞이하는 주의 부활은 우리에게 아편과 같은 역할만 할 뿐입니다.

 예수의 삶과 선포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지난 7주간 어설프게나마 사랑하는 예수마을 가족들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을  요약한 것을 아래에 실습니다.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온전히 알고 살아가는 사람과 공동체에 참 부활신앙이 정착될 것입니다. 나의 나라 그리고 우리 교회만을 생각하는 성도와 교회에는 진정한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우주적 교회를 지향하며 참 하나님의 백성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주적 죽음이요 그의 부호라 역시 우주적 지평을 가진 부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생각 그리고 삶의 동선의 지평을 넓힙시다. 에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지평이 우주적이듯이 우리의 목회와 신앙생활의 깊이, 높이 그리고 넓이도 우주적 차원까지 승화시켜 피조세계도 우리의 목회와 성도의 교제에 포함시키는 예수의 마음을 간직하며 이 부활과 새 봄을 맞이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1. 예수와 하나님 나라 시리즈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여섯 번에 걸쳐서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생각해 온 하나님의 나라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 통치, 다스림 등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이것이 미치는 영역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로 말미암아 이 땅에 구체적으로 임한 나라이다.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 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예수의 선포와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느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안에 포함된 나라이고 또한 예수의 삶과 선포의 중심이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하고 장애를 입고 고통당하는 연약한 이웃들에게 먼저 임한 나라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하는 나라이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의 나라, 사랑의 나라, 평화의 나라, 기쁨의 나라 그리고 차별과 소외 없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나라이다.

넷째,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시기를 원하셨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이 땅에 확장되고 세워진다. 이 일을 위해 교회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특정한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 가는 나라가 아니다.

다섯째, 예수의 오심, 그의 예루살렘성 입성과 죽으심은 그야말로 초라할 정도로 낮아지고 겸손한 삶 그 자체였다. 말구유에 태어나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공생애 그리고 나귀타고 입성하셔서 결국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의 생애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였고 어떻게 임하는 지를 우리에게 몸으로 보여주신 산 증거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처럼 소리 소문 없이 자라고 번지고 예수와 그 나라의 참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의 헌신과 섬김으로 세워지는 나라이다.

여섯째,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일상과 삶 전체 그리고 공동체에 인격적으로 임하는 나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피조세계에 임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일곱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로 말미암아 이미 이 땅에 도래했지만 여전히 진행 중이다. 즉 완성은 아직 아니다.

여덟째, 하나님의 나라의 전파와 세움을 방해하는 끊임없는 악의 세력과 유혹이 있다. 어떻게 극복하고 견뎌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수 있을 것인가? 성령의 도움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삶을 집요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묵상해야 할 것이다.


2. 예수, 바울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행 1,1-3; 14,22; 28,30-31)


사도행전 1,1-3절에서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께서도 여전히 그가 공생애 동안에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고 전파했음을 알리고 있다. 즉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을 잇는 가장 핵심 주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의 구속적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땅에 도래한 것이다.

바울은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권면한다 (행 14,22). 그렇다! 하나

 님의 나라는 고난 없이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이다. 예수의 삶 그 자체가 좁은 길이었고 양의 문으로서 자기 자신을 계시한 예수의 그 문은 바로 좁은 문이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만이 멸망으로 가지 않고 생명으로 인도될 수 있고 풍성한 생명의 꼴을 우리 주 예수로부터 얻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설교했다(행 28,30-31).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삶과 메시지의 중심일 뿐 아니라 바울 사도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의 중심 메시지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사도적 전승을 이은 오늘의 교회의 삶과 선포의 중심도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a. 오늘 당신의 삶속에서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가 어떻게 적용되어질 수 있겠는가?

b.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를 좀 더 넓혀 우리의 일상 즉 사회, 경제와 정치 분야에서 어떻게 이해하며 실천해 나갈 수 있을지 이야기 해보자.

c. 예수의 십자가의죽음과 부활은 우주적 지평 속에 있는 죽음이요 부활입니다.  특별히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야기 해 봅시다.


2013년도를 맞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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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14:43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2013년도를 맞이하면서                              


사랑하는 예수마을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2012년을 보내고 이제 삼일 후면 2013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먼저 시편 116편 12절에 나타난 시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그렇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여러분의 가정에 부어주신 은혜가 큽니다. 먼저는 그 은혜에 감사와 찬양으로 응답하시면서 저문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여러 모양으로 수고해 주신 모든 성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너희 교회 담임목사의 철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답하시겠습니까? 저의 목회철학은 “예수, 희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이 세 가지와 이에 토대를 둔 “건강한 교회”입니다.  (희년이라는 단어가 좀 생소한 분은 레 25,8-55절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저의 목회철학에 근거하여 2013년도 교회 표어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교회”로 정했고, 주제 성구는 빌립보서 2장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입니다. 바르고 건강한 신학과 삶은 바로 예수님의 삶에 근거한 것입니다. 참 영성 있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상과 사람들에게 가지셨던 그 태도를 취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가신 길을 걸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빌 2장 6절 이하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는데 한 마디로 가난한 마음, 비우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의 중심에는 평화, 공평과 겸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표어와 주제성구와 함께 2013년도 우리 교회가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를 아래의 6가지로 정했습니다. 이 6가지를 온 성도들이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다는 못 지켜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전교인 성경 200독 달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청년들까지 합쳐서 약 120-30명쯤 되니 모두가 1독 한다고 해도 120-30독 밖에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반 정도는 2독을 해야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누군가가 이 위대한 모험을 감행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가난한 마음 갖기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생활화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참된 영성의 기본입니다.


셋째, 욕심 부리지 않기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고 야고보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골 3,5). 2013년에는 소유하기 보다는 마음을 비우고 가난하여 남에게 줌으로써 재물을 하늘에 쌓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영성을 소유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하며 소망합니다.


넷째, 나누는 마음으로 살기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줄 것이 있고 아무리 부자라 해도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받기를 바라기보다는 무엇인가를 먼저 줌으로써 예수 안에서 진정 풍성하고도 부요한 삶이 어떠한지를 경험할 수 있는 2013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나눔으로써 모두가 부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섯째, 서로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삶 살기입니다. 예수의 삶은 한마디로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살리는 삶이었습니다(롬 15장 7절 말씀).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지체들을 온전히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2013년이 됩시다. 


마지막으로 넉넉하고 부드러운 마음 갖기입니다. 비로 우리의 일상이 쪼들리고 팍팍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넉넉함과 부요함이 가득하여 편협하고 쌀쌀맞고 냉랭한 삶이 아닌 따뜻하고 받아들이는 넓은 품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쉽게 성내지 않고 상대방을 긍정적으로 웃음으로 바라봅시다. 

여러분에게서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가 퍼져 나오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봄으로써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쓰신 글을 읽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3년 한해에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기쁨. 소망  그리고 평화가 여러분의 일터, 가정 그리고 일상 속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저의 목회철학, 교회 표어와 주제 성구 그리고 6가지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늘 기억하시면서 2013년도를 성령의 충만한 은총 아래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여러분을 섬길 수 있어 행복한 목사 장승익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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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교회에 대한 단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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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14:42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건강한 교회에 대한 단상 (1)    -  2012.7



건강한 교회는 어떠한 교회일까?

 

교회의 건강성의 척도는 무엇일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기준 삼아 한 교회의 건강함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1994년 목사 안수를 받은 이래 공부할 때나 목회를  할 때나 항상 건강한 교회가 어떠한 교회인가에 대해 나름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며 목회해 왔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람들 혹은 그들의 모임으로서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거룩한 무리 즉 성도이며 거룩한 공동체이다.

 

 거룩은 무엇인가? 구별되었다는 의미이다. 즉 교회의 건강성의 중요한 척도중의 하나가 바로 이 거룩이다.  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다. 나는 교회로서 지금 구별된 삶을 살고 있는가?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는 분명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선택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즉 거룩한 삶을 살아내지 않으면 구별된 삶을 살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그렇다면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다. 이런 측면에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교회된 성도가 머리된 예수에 의해 움직이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교회가 되기 전에는 나의 생각대로 즉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했고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교회라면 확실히 달라야 한다. 왜 그러한가? 머리가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다 아는 바 인간에게 있어서 뇌는 곧 우리의 사고와 행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뇌에 의해 사고하며  행동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곧 성도는 예수에 의해 이끌림 바 된 삶을 사는 존재이다. 이를 성경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일컫는다(고후 5,17). 그렇다. 교회는 성도로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피조물된 교회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거룩이다. 거룩한 삶을 사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세상과 분별된 삶을 살되 교만하지 않고 그렇지 못한 삶을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으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몸으로 살아내는 성도가 바로 건강한 교회이다. 이런 길을 예수가 걸어갔다. 오늘의 우리의 삶의 정황속에서 거룩한 삶, 분별된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떠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가? 여러가지를 말할 수 있지만 간단하게 몇가지만 적고자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미 위에서 언급한 예수의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길을 걷는 것 그의 삶을 본받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영성인데, 건강한 교회는 바로 이 예수의 영성을 소유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치열하게 끊임없이 그 길을 걸어가고자 분투하는 삶을 사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건강성은 한 교회가 한 성도가 어느 정도 예수의 영성을 소유하고자 구별된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과거도 현재도 아니고 보다 엄밀히 말해 현재진행형이다. 예수의 영성을 몇가지로 서술하면,

 첫째, 예수의 영성은 낮아짐과 자기 비움의 영성이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예수의 거룩함의 특징 중의 하나가 낮아지심과 자기 비움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물음의 답에서 영성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기에 낮아질 수 있었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게 하실 수 있었다. 예수를 따르는 건강한 교회는 사랑의 영성을 소유해야 하는데 이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많은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행동과 삶으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저들이 거짓을 말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과 같은 연약한 죄많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최근 고전 13장을 설교하면서 여러번 성도들에게 말한 바 있다. 죄인된 인간이 어떻게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그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유일한 그 방법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에 이끌림 바된 삶을 사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을 인식할 수 있고 또 그 사랑을 조금이나마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성령에 예민하게 움직이고 이끌려 살아갈 때 우리 역시 낮아짐과 자기 비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은 사랑의 영, 생명의 영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분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한다. 하여 교회는 항상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진정 우리 교회(나는)는 세상의 영에 의해 움직이는가, 아니면 성령에 이끌림 바 된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둘째로 생각할 수 있는 거룩한 삶은 차별하지 않는 평등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삶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사람을 특히 죄인들을 차별했다. 하지만 예수는 당시 죄인들, 예를 들면 세리, 창녀,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들, 이방인들과 어린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연대하시고 그대로 품으셨다. 사실 이들은 사회적 약자이다. 예수는 사회적 약자의 친구였다. 그들과 우정을 맺으며 사셨던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이러한 예수의 영성을 진정 배워야 할 것이다. 나같은 목회자들은 더욱 깨어 이 점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먼저는 교회 안의 성도들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진정으로 품음과 동시에 어려운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는 더욱 주의 사랑으로 품고 돌보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땅의 교회는 고통당하며 소외당하며 절망과 고통속에 신음하며 울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과 함께 진정 사랑으로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먼저 내거 속한 공동체의 식구들에게 먼저 관심을 갖고 사랑으로 다가감으로 이러한 영성 훈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함께 있는 믿음의 식구들에게 먼저 주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고 사람을 외형으로 -그의 수입, 학벌, 지위나 직업 등으로- 차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땅의 사람들이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영성이 곧 예수의 영성이다.

 

 세째로 거룩은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소유하기 보다 받고자 하기 보다 먼저 대접하고 자신의 것을 끊임없이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곧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셨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나누는 삶을 사는 교회 성도가 되자. 이것이 거룩이요 예수가 걸어갔던 길이다.

 

우리도 예수의 길을 걷자. 함께 걸을 수 있도록 서로 서로 격려하며 본을 보이자.

 

건강한 예수마을 공동체를 그리며 몇 자 적었다. 우리 공동체를 진정 사랑하는 자만이 예수의 길을 걸을 수 있다.

당신은 진정 교회를 사랑하는가?


2018 도서추천

Posted by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2018.04.04 14:35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2018 도서추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 한해 지내면서 아래의 추천 도서들을 찾아 읽으심으로 큰 영적 기쁨이 있고 신앙과 삶의 진보가 있기를 기원 드립니다. 자세한 소개는 인터넷에 잘 되어 있기에 간단하게 저자, 책제목 그리고 출판사만 적습니다. 


1. 김덕영, 루터와 종교개혁, 도서출판 길 2017

2. 김근주, 이사야 특강, IVP 2017

3. 김동춘 편집, 칭의와 정의, 새물결플러스 2017

4.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사랑과 정의, IVP 2017

5.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좋은 씨앗 2003

6. 헨리 나우웬, 돌봄의 영성, 두란노 2014

7. 존 도미닉 크로산, 가장 위대한 기도,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

8. 톰 요더 뉴펠트, 에베소서, 대장간 2017

9. 톰 라이트, 신약의 모든 기도, IVP 2015

10. 송강호, 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 IVP 2012

11. 크리스틴 폴, 공동체로 산다는 것, 죠이선교회 2014

12. 에마뉘엘 카통골레.크리스 라이스, 화해의 제자도, IVP 2013

13. 미로슬라브 볼프, 베품과 용서, 복 있는 사람 2008

14. 정지석, 퀘이커리즘으로의 초대, 대한기독교서회 2014

15. 이동춘, 한반도 통일논의의 신학담론. 정치신학에서 화해신학으로,     나눔사 2017

16. 공광규 시집, 담장을 허물다, 창비 2013

17. 담장 허무는 엄마들, 담장 허무는 엄마들 글. SCN 기획, 꿈꾸는 사람들의 

    블로그 북 2007

18. 이진오, 재편, 비아토르 2017

19. 짐 벨처, 깊이 있는 교회, 포이에마 2011

20. 크리스토퍼 스미스.존 패티슨, 슬로처지, 새물결플러스 2015

21. 이도영, 페어처치, 새물결플러스 2017

22. 게리 토마스, 거룩이 능력이다, CUP 2012

23. 권김현영 엮음,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교양인 2017

24.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16

25.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여성,자연,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갈무리 2014

26. 한국여성연구소(엮음), 젠더와 사회. 15개의 시선으로 읽는 여성과 남성, 

   동녘 2014

27.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IVP 2013

28. 양희송, 이매진 주빌리, 메디치 2016

29. 로렌스 형제, 하나님 임재연습, 규장 2008.

30. 리차드 포스터, 묵상기도, IVP 2011



2017 도서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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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14:34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2017 도서추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 한해 지내면서 아래의 추천 도서들을 찾아 읽으심으로 큰 영적 기쁨이 있고 신앙과 삶의 진보가 있기를 기원 드립니다. 

자세한 소개는 인터넷에 잘 되어 있기에 간단하게 저자, 책제목 그리고 출판사만 적습니다. 


1. 헨리 나우웬, 영적 발돋음, 두란노

2. 톰 라이트, 우상의 시대, 교회의 사명, IVP

   동일저자, 이것이 복음이다, IVP

3. 존 캐버너, 소비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 (개정판), IVP

4. 장 바니에, 공동체와 성장, 성바오로

5. 스콧 맥나이트, 하나님 나라의 비밀, 새물결 플러스

6. 도널드 크레이빌,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 나라, 복있는 사람

7. G. K. 체스터턴, 정통, 아바서원

8. 요한 크리스토트 아놀드,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플라우 출판사

9. 김재수, 99%를 위한 경제학, 생각의 힘

10. 나오미 클라인,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자본주의 대 기후, 열린책들

11. 재레드 다이아몬드, 어제까지의 세계. 전통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김영사

    동일저자, 나와 세계, 김영사

12. 스탠리 하우어워스, 한나의 아이, IVP

13. 필립 얀시,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IVP

14. 필립 얀시/폴 브랜드, 그분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인간, 포이에마

15. 디트리히 본회퍼 책들, 대한기독교서회

16.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복 있는 사람

17.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2.3.

18. 마르바 던,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교회, 복 있는 사람

19.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안식, 복있는 사람

20. 동일저자, 예언자들, 삼인


삼위일체 관점에서 본, 예수의 디아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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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14:31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삼위일체 관점에서 본, 예수의 디아코니아
[326호 커버스토리]
[326호] 2018년 01월 04일 (목) 11:25:06장승익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담임목사  goscon@goscon.co.kr

세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현장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창조와 구속으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로서 온 우주가 그분의 사역지다. 즉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삼위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이신 하나님 안에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완벽한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를 이루시며 존재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은 곧 하나님의 본질이요 그의 사역이다. 창조와 구속 곧 삼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분의 다스림 안에 모든 피조물이 있다. 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는 장애인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장애를 갖고 태어난 동물도 있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기형적 형태의 식물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이 태어남에 대한 신비를 다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삼위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에는 이 모든 것들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어느 피조물 하나 예외 없이 그분의 통치 가운데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으로 침투해 들어오셨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삼위 하나님이 멋들어진 하모니로 이 땅에서 일하시는데, 이것을 삼위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로 설명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은 신비다. 다만 하늘이 땅으로, 우리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기에, 이 일을 가능케 하신 성령에 예민하게 움직일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일하심에 대해 깨어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 육의 몸을 입고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거하셨고, 사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이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땅으로 오셨다. 삼위 하나님의 완벽한 코이노니아는 다른 한 위인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는데, 이러한 구속 사역이 바로 세상을 섬기는 하나님의 디아코니아로 나타난다. 디아코니아 역시 삼위 하나님의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보내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고, 보냄을 받은 분은 성자 하나님이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성령 하나님에 의한 사건이다. 그분이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은 신비다. 하지만 성령에 의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 안에서 이 신비는 부분적으로 드러났다.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의 디아코니아 사역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가 좀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를 알아야 한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무슨 말을 하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사셨는가를 복음서를 통해 살펴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좀 더 선명하게 알게 된다. 하지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의 탄생과 사역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기에 우리 역시 성령에 이끌린 바 되어야 한다. 성령의 다스림 속에 거해야 그나마 신비를 어느 정도 파헤칠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 성자 예수는 성령에 의해 잉태되어 태어났고(마 1:18), 공생애 시작 시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체험했다(마 3:16). 요한복음 14:16에 의하면 예수는 또한 보혜사이다. 누가복음 4:1에 의하면 예수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고 성령에 이끌리셨다. 또한 누가복음 4:18-19에 의하면 예수는 성령의 충만한 임재와 기름부음을 인식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새번역, 이하 새번역)


예수의 디아코니아 사역으로서 하나님 나라 사역은 철저히 성령에 의한 사역임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는 하나님의 충만한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께서 인식한 사역은 곧 성령에 의한 하나님 통치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점에 대해 누가복음 4:18-19이 명확하게 설명한다. 그것은 가난한 사회적 약자에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포로되어 갇힌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여 자유케 하고, 눈먼 시각장애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는 사역이다. 이러한 사역은 주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을 선포하는 사역이다. 이러한 예수의 사역은 육체적 심리적 해방뿐 아니라 정치·사회적 지평으로 확장된 자유와 해방의 선포이다. 이것이 예수의 디아코니아요 삼위 하나님의 디아코니아다.

어떻게 이러한 사역을 예수가 감당할 수 있었는가? 그의 ‘온전한 비움’에서 그 단초를 발견한다. 이 ‘온전한 비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명확한 진술을 빌립보서 2:6이하에서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 2:6-8)


 예수의 ‘온전한 비움’은 종의 형체를 가져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 온전한 비움 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완벽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질 뿐 아니라 세상을 섬김 즉 디아코니아 또한 자발적으로 온전히 그 결실을 맺는다.

예수는 진정한 종으로서 섬기는 자 곧 ‘디아코노스’였던 것이다. 누가복음 22:27에 의하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섬기는 자”라고 말한다. 여기서 섬기는 자로서 예수의 자아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마가복음 10:45은 이렇게 말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섬기는 종으로서 예수의 디아코니아 사역은 곧 하나님의 구속과 창조 사역 그 자체임을 알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의 완벽한 코이노니아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이를 요한일서 1:3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이라고 증언한다. 인간이 성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우리 주와의 코이노니아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삼위 중 한 분인 성자 하나님이신 영생의 말씀으로서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는 것이다(요일 1:2-3). 그러므로 ‘디아코노스’인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가 절묘하게 조우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다.


디아코니아의 본질,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다. 삼위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의 본질 역시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인간이 되실 수 있었고, 또 실제로 인간이 되셨다. 전능하신 창조주요 구속주가 되신 하나님이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장애를 입으셨음을 의미한다. 장애를 입으신 사랑의 하나님은 아들 예수 안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이다.

잠시 상상을 해보자.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장애를 입으셨을까? 아니 인간으로 오신 예수는 어떤 장애를 안고 공생애를 사셨을까? 성경은 이 점에 대해 침묵하기에 우리는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수 없다. 하여 나는 이것을 신비의 영역 안에 두고 싶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예수의 장애를 논한다면 역시 신비의 영역 범주 안에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영적 신비이기에 이성으로는 정확히 간파하기 힘들지만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 신비에 어느 정도 이를 수 있다.

첫째는 예수의 고난이다. 그의 고난과 장애의 연결점은 두 가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구약적 맥락인데, 이것은 이사야서에 나타난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에 기인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 53:3)


이사야서에 나타난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은 그야말로 고통과 슬픔을 몸에 달고 살았고, 병적 장애에 시달리는 종이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이 심부름꾼으로 보낸 하나님의 디아코노스로서 ‘상처 입은 장애인’이었다.

상처 입은 장애인으로서 고난 받는 야훼의 디아코노스 사역의 특징은 무엇인가? 우리는 뒤이어 나오는 5절에서 신비를 발견한다. 종으로서 그분의 섬김 사역은 찔리고, 상처 받고, 징계 받고 그리고 매 맞는 일 이렇게 네 가지로 나타난다. 이러한 그의 디아코니아적 사역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의 네 가지 사역으로 인해 분열과 갈등으로 찢어진 공동체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질병의 장애가 나았다. 이것이 신비다. 신비는 생명과 창조의 영역이다. 신비는 역설의 세계이다. 신비는 이성을 넘어선 세계지만, 이성으로 전혀 이해 불가능한 영역은 아니다. 야훼의 종 자신이 고통과 질병을 친히 담당함으로 고통 받는 약자인 타자와 공동체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생명의 기적을 체험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고난 받고 병들고 연약한 타자와 사회적 약자를 그대로 끌어안는 야훼의 종의 고난, 긍휼과 사랑이 장애를 치유하는 신비를 낳는다.

다른 하나의 맥락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리신 몸을 포함한 그분의 공생애 자체에서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는 장애를 입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이사야서에 나타난 고난 받는 야훼의 종처럼 채찍에 맞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는 슬픔을 당하고 연약한 타자를 향한 긍휼을 몸에 지니셨다. 예수의 긍휼을 나타낸 헬라어가 ‘스프랑크니조마이’로서 타자를 불쌍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 등의 뜻이다(마 9:36; 눅 7:13 참조). 명사 ‘스프랑크논’은 창자, 내장 등 오장육부(행 1:18), 애타는 감정, 마음 등의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고난 받고 병든 타자에 대해 긍휼함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의 오장육부가 움직이고 뒤틀리는 아픔, 곧 장애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마음이 간절하고도 애타게 장애인과 약자를 향해 있어 그들의 모든 것을 그대로 끌어안는 일치감을 갖는 것을 뜻한다. 예수는 장애 입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타자의 모든 것을 그대로 자신의 아픔과 장애로 흡수한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을 품는 것은 장애 입은 성자 예수의 고난의 종으로서의 사역이다.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만나는 수많은 장애인들과 병든 자를 고치셨다는 것이다. 하여 병들고 장애 입은 그 타자는 때로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리고 그가 안수하는 치유의 손길에 의해 고침을 받는다. 하나님 나라가 말로만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병든 자와 장애인들이 치유·회복되는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임하는 것이다. 이것은 메시아로서 타자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갖는 힘이다. 마치 구약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메시아의 통치가 임하면 일어날 놀라운 표징을 예언했던 것이 예수에 의해 이 땅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듣지 못하는 사람이 두루마리의 글을 읽는 소리를 듣고, 어둠과 흑암에 싸인 눈 먼 사람이 눈을 떠서 볼 것이다. 천한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더없이 기뻐하며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사 29:18-19)


이 예언의 말씀을 보면 청각장애인이 들으며, 시각장애인이 보게 되고,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리라고 선포한다. 메시아가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장애인의 회복과 연약한 자들 가운데 임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포함된다. 또 다른 이사야 본문을 살펴보자.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사 35:5-6)


이 본문에서도 메시아가 오면 시각, 청각 그리고 지체장애인 등 각종 장애를 입은 이들이 회복됨을 노래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메시아 시대의 특징이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또 다른 고난 받는 야훼의 종에 대한 본문인 이사야 42:6을 보면 야훼께서 이 고난 받는 종을 유대 백성의 언약과 이방인의 빛으로 삼았음을 약속한다. 이어 7절은 이렇게 약속하고 있다.


네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이다. (사 42:7)


이 약속은 예수에게서 이루어졌다. 예수는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그는 구약 언약을 이루신 분이셨다. 바울은 로마서 15:8에서 예수를 “할례 받은 자들의 종”(디아코노스 테스 페리토메스)으로 말하면서 예수께서 구약 율법을 온전히 이루었음을 선포했던 것이다. 

이사야 42:7은 너무도 유사하게 회복의 의미에서 누가복음 4장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희년의 모습과 일치한다. 이러한 구약 예언이 예수의 공생애 사역 중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위해 마태복음 4:23-24을 보자.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모든 환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과 간질병 환자들과 중풍병 환자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또한 마태복음 9:35-36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의 이 두 본문을 통해 볼 때,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장애인과 병든 자들이 치유, 회복되는 생명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사야서의 예언이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과 섬기는 종으로서 예수의 섬김 사역, 성부 하나님과 성령, 이 삼위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의 결정체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애인, 고통 받는 이들을 치유하신 예수
예수는 마태복음의 사례처럼 불특정 다수의 장애인들을 고쳐주셨을 뿐 아니라, 사역 중 만나는 외롭고 고통 가운데 괴로워하는 그 한 사람을 치유하셨다. 또한 직접 찾아가 그를 고쳐 주시기도 하셨다.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몇 가지 사례가 나타나 있다.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운 38년 된 병자가 대표적이다. 예수는 그 못가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유독 이 38년 된 병자에 주목하고 그에게 다가가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말을 걸고 그를 고치신다. 예수는 못가에 있는 아픈 자와 장애인 중 아마도 이 38년 된 병자가 가장 연약한 자임을 알아챘던 것이다.(요 5:6 참조) 이렇게 예수는 무리 중 가장 연약한 자를 주목한다. 길 가시다가 예수는 시각장애인 거지 바디매오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듣고 그를 부른 후 그의 눈을 뜨게 한다. 마가복음 7:32 이하를 보면 사람들이 예수께 언어/청각장애인을 데려오는데, 예수께서 따로 데리고 가셔서 그의 장애를 고침으로 그는 듣게 되고 말하게 된다. 마가복음 8: 22에는 벳새다에서 시각장애인을 두 번 안수하여 고치기도 했다. 마가복음 9장에서는 정신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의 병을 고치신다(막 9:14-29 참조). 이것이 디아코노스 즉 종으로서 예수의 섬김이다.

예수의 디아코니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병들고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에게 먼저 주목하셨다는 것이고, 저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예수의 섬김을 디아코니아와 연계해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그의 사역이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앓는 사람들의 필요만 채운 것이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심리적으로 소외당한 채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를 환대했고 그들을 찾아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예수의 디아코니아다. 여기에는 당시 주류 사회에서 배제된 채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들 수 있다. 예수는 어린아이들을 안으시고 축복하시면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예수 사역의 중심이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예수의 말은 가히 혁명적이요 급진적이라 할 수 있다. 어린아이 혹은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가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있다는 가르침이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요, 자신을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채 가난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인 작은 자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예수의 환대의 디아코니아를 엿볼 수 있다. 예수는 우리 주위에 병들고 가난한 사회적 약자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요, 그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자신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마 25:31-46 참조). 이를 통해 오늘의 교회가 어떤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디아코니아, 고통받는 모든 이를 사랑하는 삶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부어졌다.(롬 5:5) 성령의 역사 안에서 우리에게 부은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자유케 한다. 성령은 자유의 영이면서 해방의 영이다. 이 자유케 하는 사랑은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사랑이다. 그런데 이 성령의 자유와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 예수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성령의 자유와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소유케 한다(갈 5:6 참조).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써 의의 소망을 기다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삼위 하나님 중 성령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의 디아코니아이다.

율법서인 레위기 19:14을 보면 “청각장애인을 저주해서는 안 되고, 시각장애인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하시면서 이 흐름 속에서 18절에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장애인뿐 아니라 정치적·경제적·사회적·심리적으로 연약한 자 모두가 우리의 이웃이다. 율법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이루어지고(롬 13:10; 갈 5:14 참조), 나아가 서로 짐을 나누어지면서 서로 사랑할 때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게 된다(갈 6:2; 요 13:34-35).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디아코니아 실천을 교회가 감당할 때 세상은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종으로서 사심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마치 주인 대접을 받으며 오히려 높아졌다. 이것을 고린도후서 8:9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더 많이 소유하려는 탐심으로 채워 부자가 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낮아짐과 삼위 하나님의 디아코니아로 인해 부하게 된 우리들이 진정 삼위 하나님의 디아코니아에 공의롭고 풍성히 참여함으로 삼위 하나님에 대해 부요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삼위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예민하게 반응하여 사역하셨듯이(이것이 하나님의 부함이다!), 오늘 우리도 성령 안에서 깨어 그러한 삼위 하나님의 디아코니아처럼 최선을 다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에 참여하는 우리의 부요함이다. 이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장승익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담임목사로, 세계밀알연합 이사와 ISF 이사, 학원복음화협의회 중앙위원이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M.Div.)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Dr. Theol.)를 취득했다. 독일 남부지방한인교회 담임목사, 기독교재독한인교회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2015년 10월, 신학도들과 목회자들, 가나안 성도들을 섬기는 ‘예수 희년과 하나님 나라(예희하) 연구소’를 열었으며, 장신대 겸임교수로도 섬긴다.



*출처 : 복음과 상황 /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166

청년들이 희년을 경험하는 교회 (‘희년마을기금’ 운영하는 예수마을교회 장승익 목사)

Posted by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2018.04.04 14:29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인터뷰] 청년들이 희년을 경험하는 교회
[319호 커버스토리] ‘희년마을기금’ 운영하는 예수마을교회 장승익 목사·이파람 전도사
[319호] 2017년 05월 24일 (수) 15:55:51오지은 기자  ohjieun317@goscon.co.kr
  
▲ 장승익 목사 ⓒ복음과상황 이범진

서울 행운동에 위치한 예수마을교회는 지난해 12월부터 청년부를 대상으로 ‘희년마을기금’ 운영을 시작했다. 청년부원 중 어느 누구라도 급히 돈이 필요하면 1인당 한 달에 50만 원 한도(연 600만 원) 내에서 희년마을기금을 신청할 수 있고, 교회는 별도의 심사 없이 즉시 무상으로 지원한다.

서울대학교 인근에 위치하여 청년들을 중심으로 성장해온 예수마을교회는 설립한 지 올해로 18년이 됐다. 일반부 80-90명, 청년부 40명, 영유아·청소년 70명 정도의 교인이 출석한다. 일반부 성도 대부분이 청년 시절부터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온 것이 특징이다. 희년마을기금은 청년들의 필요와 전 교인의 물심양면 후원으로 시작되었으며,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정관을 만들었다. 정관상 정기 총회 및 가족회의에서 매년 담당 교역자가 기금 운용 상황을 보고하며, 회계 및 감사에 관한 사항은 교회 정관을 따른다.

기금 출범 이후 지금까지 열 번의 신청과 지원이 있었다. 부임 초기부터 ‘예수, 희년, 하나님 나라’를 목회 중심에 둔 장승익(53) 담임목사는 희년마을기금에 대해 “우리 교회 특성을 살린 희년 실천의 일환”이라고 했다. 장 목사와 청년부 담당 교역자인 이파람(36) 전도사에게서 희년마을기금 이야기를 들었다.


― 교회 자체적으로 청년층에 특화된 ‘희년마을기금’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장승익(장): 작년 12월부터 시작되고 아직 초기 단계입니다. 그래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을 때 망설였는데, 부족하더라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다른 교회들이 혹시 참고할 만한 내용일지도 몰라 응하기로 했습니다. 이 기금의 수혜 대상은 등록 청년 교인입니다. 운영은 희년마을기금 정관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특히 이 정관은 청년들이 토론을 거듭하여 만들었습니다. 초안을 놓고 거듭 논의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서로 문제제기를 하고 또 토론하는 모습이 참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이파람(이): 목사님 말씀처럼 희년마을기금 정관은 위에서 계획하고 하달된 것이 아니에요. 청년들이 비슷한 경험에서 겪는 불편함과 어색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스스로 정관을 만들고 토론을 거쳤습니다. 예를 들면, 보통 비슷한 기금들을 신청하면서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어렵고 가난한지를 평가받아야 하는 애로 사항이 있잖아요. 얼마나 괴로운 일이에요. 이런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청년들이 함께 정관을 만들었지요. 청년들의 이러한 마음과 전 교인들의 희년에 대한 공감대를 통해 시작되었어요. 청년들에 의해 앞으로도 더 보완되고 확대될 수 있고요.


― “희년에 대한 공감대”라고 하셨는데요.
장: 이 기금의 목적이 ‘예수, 희년, 하나님 나라’예요. 우리 교회 공동 비전이지요. 제 목회 철학이자 우리 교회 연구소 이름(예.희.하 연구소)이기도 해요. 막연히 희년이라고 하면 ‘난 토지가 없는데’ ‘난 돈도 없는데’ ‘내가 누구를 노예 삼았나?’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어려운 개념은 아니지만 오늘 이 땅에서 희년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처음엔 감이 잘 안 오는 게 사실이에요. 저도 목회 초기에는 10주 정도 시리즈로 예수, 희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설교했지만 성도들에게 피부로 잘 가닿지 않더라고요. 지금은 몇 년 전부터 희년에 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매년 희년실천주일로 지키기도 하지만, 일상에서의 희년 이야기를 많이 해요. 감사하게도 많은 교우 분들께서 예수, 희년, 하나님 나라라는 목회 원리에 동의해 주시고요.


― 지금 우리에게 희년이란 무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장: 결국은 사회적 약자에게 해방을 주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한국 사회는 지금 빈부의 격차가 극심하지요. 희년을 실천하려면 이 시대에 교회가 청년, 여성,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탈북민,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어야 합니다. 더 나아간다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거듭 지적한 에피투미아(ἐπιθυμία), 우리 안에 잠재하는 욕망을 들여다보아야 하고요. 항상 돈에 관심이 많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싶어 하는 우리 안의 본능 말이지요. 희년을 실천하는 것을 고민하지만, 우리에겐 언제나 우리 욕망을 채우려 하는 본능이 공존하니까요. 이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 이파람 전도사 ⓒ복음과상황 이범진

― 욕망을 말씀하셨는데, 교우들 중에 청년에게 조건 없이 돈을 지원하는 데 반대하거나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는 분은 없나요?
이: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고, 저와 목사님, 청년부장님 이렇게 세 명이 기금운영위원인데 아직 그런 말씀을 하신 분은 없었어요. 기금 관리의 측면에서 고려할 수 있는 점이기도 하지만, 목사님이 말씀하신 희년 정신을 기본으로 하면, 우선 청년들을 믿음으로 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전제로 해야 하지요. 정관에 나와 있다시피, 희년마을기금 신청은 본인 스스로 이런 저런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 외에 얼마의 신청 액수만 위원에게 요청하면 되는 시스템이에요. 교회가 먼저 청년들을 신뢰하고, 그 바탕 위에서 청년들도 교회를 신뢰할 수 있어요. 목사님이 계속 강조해오신 성경의 희년 정신과 희년마을기금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교회 공동체성의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회도 점점 더 개인적이 되어 가고, 교회는 더욱 신뢰를 잃어 가는 시대에 청년이 명백한 사회적 약자라고 보는데요. 교회가 먼저 그러한 청년들을 품고 신뢰한다면, 청년들이 다시 교회에 믿음을 갖게 되어 교회의 청년부 공동체성이 회복되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장: 설령 도덕적 해이의 상황이 발생한다고 해도, 꾸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일단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속는 줄 알면서도 돈을 꿔준 적이 꽤 있어요. 대학생 때부터 돈 필요한 사람한텐 일단 있는 만큼 주고 봤거든요. 더군다나 우리 교회 성도들은 한 가족인데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물질의 경우 이 방식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일반부와 청년부가 한 몸을 이루면서 같이 성장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이런 분위기가 한국교회 전체에 공유되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악의 힘이 꽤 큰 것 같습니다.

― 청년들의 사정을 이해해주는 기금 같네요.
장: 비슷한 장치를 두고 있는 몇 교회의 정관을 찾아보니 금액이 더 적고 어느 정도 조건들이 있었어요. 우리는 기금 사용을 청년으로 한정하는데, 사실 청년들은 언제라도 돈이 급히 필요할 수 있거든요. 저와 전도사님이 청년들의 개인적인 형편을 알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 하면서 공부중인 학생도 있고, 때론 집의 월세 내기도 벅찬 경우도 있어요. 만약 당장 내일까지 돈이 급하게 필요한 청년이 있다면, 언제 서류를 작성해서 신청하고 심사를 기다리겠어요. 희년마을기금은 요청이 오면 두말없이 바로 지급합니다. 1인당 한 달에 50만 원, 1년에 최대 600만 원으로 제한을 두고 있고, 초과 금액의 경우는 청년부 전체회의를 거칩니다. 물론 기금 이용 후에 당사자 개인 상황이 나아지면 상환해서 다시 기금을 채울 수 있지만, 그걸 강요하거나 독촉하지 않습니다. 자율에 맡겨두는 거지요. 청년들의 팍팍한 현실 속에서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극단적 선택으로 몰리기도 하는데, 절박한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저는 성경의 희년과 오늘날 우리 일상을 연결 지을 때 결국 돈과 건물로 좁혀진다고 봐요. 당장은 희년마을기금의 운영을 청년들로 한정하고 있지만 형편이 된다면 전교인으로 확대할 수도 있겠지요.


― 기금은 어떻게 조성되었나요?
장: 우리 교회가 청년 중심으로 세워진 특성을 갖고 있어요. 전임자인 이승장 목사님이 기독청년대학생운동을 하시기도 했고, 청년 목회를 하셨던 분이거든요. 교회 어른들이 청년들에게 늘 관심이 많습니다. 작년 11월 마지막 주에 기금을 마련하려고 청년들이 주최를 해서 바자회를 가졌는데 생각한 것보다도 많은 돈이 모였어요. 교인들이 물건도 많이 사주시고, 기금 계좌로 후원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제 목회 지침 중 하나가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 것인데도, 성도들이 기금으로 헌금도 많이 하셨고요.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었지요.


―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성도들이 많은가요?
장: 우리 교회에는 부자도, 사업하는 분도 거의 없어요. 제가 이 교회 오고서 교인들 사정을 다 파악하지 못했을 때, ‘여러분 가운데 집을 두 채 갖고 있는 분은 한 채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시라’고 설교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설교 후에 몇 분이 저에게 와서 “목사님, 우리 교회에 그런 부자 없습니다”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사실 돈의 여부보다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그 시기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시행착오를 줄이고, 불필요한 혼란을 막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 교회는 작년 말, 희년마을기금을 시작했던 그때가 이런 일이 시작되기에 무르익었던 시점 같습니다. 희년을 중점으로 두고 목회해왔고, 예.희.하. 연구소 세미나에도 교회 어르신들이 늘 관심을 가져주셨거든요.

이: 희년마을기금은 청년들 안에서 먼저 발생한 이슈기도 해요. 교회가 외부 선교와 구제는 익숙하게 많이 하는데, 그러는 사이 정작 어려움을 겪는 공동체 구성원에 대해서는 구제의 손길을 뻗기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어요. 서로 대략 형편은 알고 있는데 직접 도와주려고 하다가 오히려 실수하거나 오해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희년마을기금은 사랑의 통로가 되었어요. 기금 마련을 위해 바자회를 하고 정관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청년부 모두가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확인한 것이 좋은 자극이었어요.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시작하고, 어른들에게는 청년들을 공식적으로 도울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서로 기쁨으로 함께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것이 우리 공동체에서 사랑을 선순환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지요.


  
▲ "비슷한 기금들을 신청하면서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어렵고 가난한지를 평가받아야 하는 애로 사항이 있잖아요. 얼마나 괴로운 일이에요. 이런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청년들이 함께 정관을 만들었지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 교회가 일심동체네요.
장: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우리 교회 성도들이 정말 괜찮은 분들이에요. 청년부도 일반부도 참 건강한 분들이지요. 목사가 집도 팔라고 말하고, 예언서 말씀을 그대로 다 설교해도 성숙하게 소화하시는 것 같아요. 다른 교회의 동료 목사들 중에는 예언서 설교를 하면 성도들로부터 ‘그런 설교 하지 말라’거나 ‘종북좌파 아니냐’라는 말을 듣는다더군요. 교회에서 그런 말이 나오면 예언서 설교하기가 쉽지 않지요. 예수님의 삶을 보면 그렇게 급진적인 분이 또 없는데 말이에요. 교회 안에서 복음의 핵심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은 정말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제가 예언서 설교를 하고, 다소 비판적인 설교를 하면 때론 개인적으로 불편하게 느끼는 성도도 있겠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스스로 성숙하게 소화할 수 있고,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에 관심이 많아요. 한 가지 아쉬운 건, 희년마을기금 신청에 대해 우리 청년들이 스스로 너무 숙고하는 건 아닌가 싶은 부분이에요. ‘나 같은 사람이 기금을 신청해도 될까’ 하고요.

이: 청년들이 기도하고 고민하며 시작된 기금이기에 청년부에서 누구든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편하게 신청하고 쓸 수 있는 분위기가 더 넓게 형성되면 좋겠어요. 그렇게 우리 청년부 공동체를 모두가 더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고요. 물론 제가 당사자라고 해도 기금을 사용할 생각을 하면 미안한 마음, 조심스러운 마음이 생길 것 같아요. 그럼에도 필요한 청년들에게 사용될 목적으로 마련된 기금이니 편히 사용하고 희년의 정신을 품으며 감사할 수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시간이 꽤 걸리겠지요. 그렇게 자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에서 희년의 좋은 경험을 간직한다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이후 어디서 어떤 영역에서 생활하고 일하든지 희년의 열매가 맺힐 것이고 그게 하나님 나라를 드러낼 거라고 생각합니다.


― 희년마을기금이 청년들이 공동체성을 경험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을까요?
장: 그럼요. 할 수 있다면 공동생활 건물도 제공하고 싶습니다. 교회들이 하면 좋을 텐데요.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이 무료로 혹은 저렴하게 거주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그렇다면 학생들의 경우에 한창 때 자기 비전을 갖고 교회 안에서 그들이 건강한 사회인이자 신앙인으로 성숙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청년들이 사회적인 정의를 세우는 일에는 다들 모이기를 잘하거든요. 동시에 희년마을기금을 통해 교회 안의 다른 지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무얼 하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는 기회가 될 수 있겠죠. 서로에 대한 친밀성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도구라고나 할까요? 시대와 현실의 한계도 있겠지만, 청년들이 다양하게 꼭 공동체성을 경험하면 좋겠어요. 얼마 되진 않았지만 희년마을기금을 운영하며 겪는 교회 전체 분위기는 참 고무적이에요.

― 청년들에게 한 말씀해주신다면요?
우선, 저 자신도 우리 시대 청년들의 한계, 시대의 한계를 보면서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도 예수를 바라보라고 강조하고 싶어요.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고 깊이 바라보고 묵상하세요. 어떤 사람 혹은 목회자가 아니라 예수를 직접 바라보는 것이지요. 저는 예수의 삶을 묵상하면서 희년을 발견하고 장애인 사역을 결심하고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청년들도 예수를 통해 자기만의 비전을 발견하게 될 거에요. 그러면 그 청년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서 주위에서 어려운 이웃들을 더욱 바라보게 될 것이고, 우리 교회를 떠나더라도 어떤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가 원하시는 방향으로 삶을 걸을 수 있을 거예요. 헤매더라도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출처 : 복음과 상황 /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70


독일교회의 공적 신앙과 한국교회 (복음의 공공성)

Posted by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2018.04.04 14:27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독일교회의 공적 신앙과 한국교회
[300호 커버스토리] 복음의 공공성, 시즌2
[300호] 2015년 10월 29일 (목) 15:26:41장승익  goscon@goscon.co.kr

독일교회와 한국교회를 비교하는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쉽지 않은 작업이다. 무엇보다 독일교회와 한국교회 간의 역사와 문화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둘째는 근본적으로 독일은 기독교가 국교이고, 대한민국은 타종교가 자유롭게 어우러진 나라이다. 독일인은 유치원 때부터 대학 가기 전까지 기독교식 종교교육을 받는다. 물론 강요가 아닌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때인 1517년을 기점으로 생각한다면 독일 루터교의 역사는 이제 거의 500년이 된다. 500년의 역사를 거쳐 온 독일 루터교회가 독일사회에서 수행해 온 공적 책임과 신앙을 이제 130년이 된 한국교회와 비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독일교회든 한국교회든 신구약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의 역할을 감당해온 것만큼은 분명하다. 양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하고 듣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양국 교회가 어느 정도로 공적 책임을 감당해 왔는가를 살피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공적 신앙의 성경적 근거와 당위성


창조신앙과 구속신앙을 통해 본 공적 신앙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창조주요 구속주로 소개하신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구속하심으로 출애굽이라는 새로운 창조 사건을 이루셨다. 성경에서 창조와 구속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다. 

창조주요 구속주 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 행위를 단지 이스라엘이나 교회 안에만 제한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뿐 아니라 온 우주 안에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사역은 ‘공적’(public)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주위 열강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원 활동을 수행해 가신 하나님은 그의 아들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다. 이 땅의 교회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행하신 창조와 구원 행위를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계속 감당해 나가라는 위임 명령을 받는다.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제한받지 않듯이 성령의 사역 역시 그러하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늘과 땅을 하나 되게 하신 성령은 교회를 통해 우주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된 교회는 이제 우주적 교회이다.

그렇다면 우주적 교회로서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된 교회는 어떤 신앙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또 살아내야 하는가?

모든 인간은 관계를 맺고 사는 한 ‘공적’(public)이다. 여기에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달리 또 하나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바로 구속주요 창조주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이요 공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공적인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신앙인은, 본질적으로 신앙인이 아니다. 


예수의 사역과 자아 인식을 통해 본 공적 신앙
예수의 동선을 추적해보면 그의 활동이 공적이었음을 알게 된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운집해 있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다. 들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고,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는 베데스다 연못 행각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다. 예수의 치유 사역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여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께 몰려왔고 또 가족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께 왔고 예수는 다 고쳐 주셨다. 

예수의 자아 인식은 어떠한가? 마가복음 10장 45절을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당신의 사역을 섬기는 사역, 그것도 자기 목숨을 내주는 사역으로 인식하고 계셨다. 누가복음 22장 27절에서도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그렇다. 예수는 항상 섬기는 자로 우리 가운데 계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가 이 땅에 오심도 공적이요 그의 생애도 공적이요 그의 죽음과 부활도 모든 인류와 피조물을 위한 공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땅에 탄생한 교회는 예수처럼 공적 사명을 품고 이 땅을 섬기는 존재로 살아내야 할 사명을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공적인 사명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교회의 본질을 통해 본 공적 신앙
교회는 태생적으로 공적(public)이다. 교회의 터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육신에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의 삶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세계와 연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은 ‘공적’(public)인 사건이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공적 신앙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고 거하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생명의 구세주이신 예수에 대한 바른 고백과 그의 길을 걷고자 하는 바른 행함에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공적 신앙과 공적 신학의 출발 역시 하나님, 그리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성경이어야 한다. 교회의 사역 터는 예배당 안의 갇힌 공간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지인 세상이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위한 화해적 죽음이었듯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공적 신앙과 공적 신학 역시 그러해야 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율법서와 예언서를 이해해야 하듯(눅 24:27; 행 28:23 참조), 공적 신앙과 공적 신학 역시 구약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해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의 삶 속에서 구약을 읽는다. 왜냐하면 예수의 삶은 구약 말씀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를 바르게 분별하며 해석해 내기 위해 역시 구약에 대한 깊은 통전적 이해가 필수적이다. 

구약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는 또한 공적 신앙과 공적 신학의 출발이자 시금석이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 이웃과 연동되어 있다. 여기에서 이웃을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인접하고 있는 모든 것의 총칭’으로 정의한다면,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일교회의 공적 신앙과 한국교회의 신앙


독일교회 ‘공적 신앙’의 근거
독일교회는 성경적 신학적 사고에 익숙할 뿐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신학적 토론에도 열려 있다. 얼핏 당연한 얘기 같지만, 독일교회와 달리 한국교회는 이 당연한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한국교회는 적어도 공적 신앙의 측면에서 볼 때 (독일교회에 비해) 반(反)성경적이다. 

적어도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독일교회는 성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어떤 이슈가 생기면 교회가 그 이슈에 대해 성경적 신학적으로 글을 내고 토론을 한다. 놀라운 것은 그다음에 ‘행동’을 한다. 그 행동은 우리나라의 보수 단체가 벌이는 황당한 시위가 아니라 누가 봐도 성경에 근거한 사회적 행동으로, 모든 시민이 동의할 수 있는 행동이다. 독일교회 혹은 시민들이 취하는 행동은 얼핏 진보적인 색채가 강해 보이지만, 기실 그것은 신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일 뿐이다. 

필자가 보기에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공평과 정의를 행하고, 가난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 물질을 즐겨 나누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다. 그들은 소박하고 욕심이 없으며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 오늘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한국교회를 어느 정도나 인정하고 있는가? 


독일교회 공적 신앙의 역사
독일교회는 어느 나라보다도 교회가 감당해야 할 대사회적인 섬김과 봉사 그리고 공평과 정의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세움을 위해 노력하는 나라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올라간다. 

김옥순은 디아코니아 신학을 연구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디아코니아 신학’이라고 명명한다. “디아코니아 신학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섬김과 인간의 세상에 대한 섬김을 직접적으로 결합시킨 것이다. 루터에 따르면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화해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활동으로서 세상에 대한 섬김이며, 하나님은 칭의된 자녀들이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으로 세상의 창조물을 갱신시키는 봉사에로 나아가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김옥순에 의하면, 루터뿐 아니라 마르틴 부처, 츠빙글리, 칼뱅 등에 의한 유럽의 종교개혁은 현대 유럽 복지국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이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된 신앙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유와 물질로 철저히 나누고 섬기는 삶을 실천해야만 한다’는 개혁신앙의 주된 명제를 확고히 붙잡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교회는 다음과 같은 김옥순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아마도 이들 국가〔선진복지국가〕에서는 개인의 소득과 소유가 사회구성원들의 행복을 위해 나눠져야 하는 물질로 인식하기에 ‘조세 저항’이라는 말을 듣기가 어려운 것 같다. 하여튼 아주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복지 실천이 신앙인의 자유로부터 나오는 삶으로서 봉사임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디아코니아와 관련해서 나타난 위와 같은 긍정적인 종교개혁의 영향은, 김옥순에 의하면, 대표적인 경건주의자들인 슈페너, 프랑케 그리고 친첸도르프 등의 경건주의 운동으로 이어진다. 특징적인 것은 이 운동이 개인 경건보다는 공동체로 강하게 통합되어 이후 19세기 새로운 각성운동에 영향을 미쳤고, 스위스와 독일에 여러 기관을 세워 조직적으로 디아코니아가 성장하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늘날 독일 개신교 사회봉사국의 모태가 되는 국내선교국을 세운 비혀른(J. H. Wichern, 1808~1881)이 나왔다. 비혀른은 국내선교국과 오늘날 고아원에 해당하는 라우에스 하우스를 세움으로 당시 산업화로 인해 만연한 인구 증가, 이농 현상, 도시화 집중 등으로 인해 생겨난 사회적 빈곤층과 고아 등의 사회·경제적인 위기를 나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비혀른의 디아코니아적인 활동의 신학적 근거는 한마디로 기독론,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으로서의 계시를 붙잡았고, 이것을 믿는 신앙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신앙이고 이러한 행동하는 사회봉사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한다고 비혀른은 생각했다.

비혀른이 살았던 프로이센 정부와 비스마르크 통치의 시대가 지나고 독일은 1, 2차 대전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특히 나치 시대 때 독일의 주교회는 히틀러의 나치에 동조하는 독일그리스도인(Die Deutsche Christen) 운동을 일으키며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즈음에 1934년 5월 31일 카를 바르트를 중심으로 바르멘 선언이 발표되었고, 또한 마르틴 니묄러, 본회퍼 등을 중심으로 한 고백교회(Die Bekennende Kirche)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바르멘 선언과 본회퍼의 글들은 오늘날 독일교회가 공적 신앙을 갖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바르멘 선언의 두 번째 테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뻗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신앙과 삶의 분리 내지는 이중적 가치를 비판한다. 정종훈은 바르멘 선언의 신학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르멘 신학성명서는 민주주의, 교회, 그리고 사회의 정치신학적 통합을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신학성명서는 독일개신교회의 반민주적인 전통을 극복하고,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개신교회의 새로운 관계설정의 기초를 창출하도록 자극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 나치의 시대가 막을 내린 후 독일개신교협의회 지도부는 1945년 10월 18일과 19일 슈투트가르트에 모여 교회와 사회에 성명서를 내놓았다. 이 자리에는 세계교회협의회의 대표자들도 참석하였다. 전쟁 후 독일교회와 시민들은 매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자신들도 전쟁과 나치로 대변되는 제3제국의 피해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지, 어느 누구도 독일 민족과 교회가 저지른 죄악에 대해 책임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슈투트가르트 성명서가 발표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교회는 슈투트가르트 성명서를 ‘슈투트가르트 죄책성명서’ 혹은 ‘슈투트가르트 죄고백’이라고 말한다. 여러 비판이 있긴 하지만, 이 성명서가 갖는 중요한 점은 전쟁 후 독일교회가 공식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는 것이다. 성명서는 독일교회로 인해 “많은 민족들과 국가들이 끝없는 고난”을 당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어 교회는 히틀러 정권하에서 “더 용감하게 고백하지 못했고, 더 진실되게 기도하지 못했고, 더 기쁨으로 신앙하지 못했고, 더 뜨겁게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스스로 고발합니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독일 사회와 교회는 지속적으로 히틀러 정권하에서 독일이 저지른 죄악을 회개하고 자녀들에게 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알리고 교육하는 일에 앞장서왔다.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지 않고 공적으로 ― 영화, 다큐, 교과서, 강연, 저술, 수용소 현장 방문교육 등 ― 드러내면서 공평과 정의의 사회를 일구어 가기 위해 독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위기: 공적 영성의 결여
이학준은 《한국 교회, 패러다임을 바꿔야 산다》(새물결플러스)에서 한국 개신교의 위기를 공적 영성과 윤리의 결여로 보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공적인 영성이 부족하기에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성서해석의 기준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입맛에 맞는 성서 구절을 짜집기하는 식의 과정을 거쳐 결국 설교를 개인의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키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유익과 영광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구하는 기복신앙으로 변질되거나, 사회와 소통할 줄 모르고 자신의 논리를 사회에 그대로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됩니다. 시민사회와 같은 공적 영역에서는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서 거의 무지하거나 무기력한 것이 한국 개신교의 실정입니다.”(30쪽)

이학준은 이어 개신교의 공적 영성의 약화를 가져오는 여러 요인들로 기복주의, 정과 연의 문화로 대변되는 가족주의, 개교회주의, 성장논리와 우상숭배, 교회와 사회의 분리를 초래하는 이분법적인 사고, 이성 경시 사상 그리고 단순논리주의를 들고 있다. 이들은 한국교회가 진정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 되는 것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것들로서, 그 결과 교회는 결국 교회 내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및 사회와 소통되지 않는 지나친 독선으로 치달을 뿐이다. 작금의 한국교회가 딱 이러한 모습이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들로, 독일교회 모습과도 배치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여전히 자신을 합리화하고 사회와 격리 불통하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근본적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공적 신앙 1: 목회자 납세와 관련하여 
근본적으로 모든 시민은 한 국가의 국민인 이상 납세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여기에 목사를 비롯한 그 어떤 종교인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한국교회가 공적인 영역에서 공적 신앙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낼 부분은 세금 영역이 아닌가 생각한다. 

독일교회의 목사 역시 소득이 있는 한 세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독일사회는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독일이 정한 세법에 따라 정당하게 세금을 걷는다. 물론 소득의 제한을 두고 월 소득이 국가가 정한 것에 못 미치면 세금을 면해준다. 

독일 세법은 매우 세밀하고 치밀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모든 국민은 정당하게 소득에 따라 세금을 내고 그에 따른 정당한 대우를 나라로부터 받는다. 즉 세금은 국민에게 복지라는 형태로 돌아간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국가는 모든 공적 영역에서 국민을 위해 복지를 비롯한 정치적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한다. 국민은 공의롭고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국가 역시 공평과 정의의 성경적인 기준에 의해 세금을 관리하고 정책을 수행한다. 정부와 국민 간에 철저한 신용이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독일에서 살았던 20여 년간 세금을 잘못 투자하거나 제멋대로 엉뚱하게 사용한 공무원들은 많지 않았다. 반면 한국은 세금과 관련하여 너무도 많은 불의와 부정부패가 드러난다. 

독일의 경우 수입이 많은 사람은 그 수입에 걸맞게 의료보험을 비롯한 세금을 낸다. 학생은 수입이 없기에 적은 의료보험료를 지불하고 일반인과 다름없는 모든 혜택을 받는다. 소득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의료보험료를 비롯한 세금이 부과된다. 

이 점은 우리나라와는 너무도 대조가 된다. 우리나라는 고소득자가 제대로 세금을 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탈세도 횡행한다. 목회자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만이라도 제대로 자기 소득에 맞게 세금을 정당하게 내면 그 세금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 효율적으로 쓰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인들이 공적 영역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리라 생각된다. 그러니 목사와 교회를 비롯한 우리 그리스도인만이라도 탈세하지 말고 정당하고 정직하게 벌고 공의롭게 세금을 내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공적 신앙 2: 교회의 사유화 극복
교회의 사유화는 분열, 개교회성장주의, 세습 그리고 담임목사 권력 남용에 빌미를 제공한다. 정말 드문 경우지만, 독일교회도 교회 운영위원회와 담임목사 간에 목회관이나 의견차가 있어 심하게 대립하는 경우가 있지만 교회가 갈라지지는 않는다. 독일교회는 철저한 지역교회이기에 청빙을 받은 목사가 나가면 나갔지, 필자가 아는 한 교회의 어려움으로 인해 한 교회가 두 교회로 갈라지는 경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독일교회는 근본적으로 국가교회이면서 주교회의 성격을 띠기에 목사와 교회의 문제는 철저히 그 교회가 속한 주교회에 의해 움직여진다. 물론 지역교회와의 철저한 협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미 오랜 전통을 갖고 있기에 주교회 본부와 각 지역 교회와의 소통은 원활하다. 

독일교회는 한국교회처럼 교회의 사유화나 세습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단점으로는 지역 교회를 부흥 성장시키려는 목회자의 의지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는 개교회 이기주의와 성장이 맞물려 세습 또는 분열로 이어져 대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크다. 이 문제는 지나치게 모든 것이 담임목사에게 편중되어 있어 담임목사의 사례와 목회비 등이 공평하게 책정되지 않는 것과 연결된다. 부교역자들과의 갑을 관계 등도 공적 교회로서의 위상에 맞지 않는다. 반면, 독일교회는 오랜 역사를 두고 형성해 왔기에 교회를 사유화한다는 생각은 없다. 담임목사의 공평하지 않은 지나친 사례나 교회 내 갑을 관계는 독일교회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공적 신앙 3: 공평과 정의를 행함
독일교회의 장점 중 하나가 불의와 부정부패가 없고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행하며 화평케 하는 사역과 환경문제, 핵문제 등에 지속적으로 반응하며 상황에 따라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 왔다는 것이다. 독일교회 안에는 한국교회와 같은 개교회 이기주의와 성장주의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과 재능을 가지고 어려운 이웃들, 난민들과 어려운 나라들을 섬긴다. 

또한 교회나 담임목사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겸손히 행할 뿐이다. 정말 독일 사람들은 겸손하다. 자신들의 행동을 자랑하지 않는다. 권위로서 사람을 부리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얼마나 성경적인가? 하지만 한국교회는 유감스럽게도 정반대다. 

아직까지 한국교회는 사회적으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거나 가난한 이웃들과 난민을 대하는 데 부정적이거나 매우 소극적이다. 이상할 정도로 사회적 이슈에 약하며, 공평과 정의와 관련된 일에 나서는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까지 한다. 해고노동자, 핵발전소, 4대강 문제 등을 외면한다. 환경문제에 관해서도 독일교회와 시민들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노동자 부당 해고와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한국교회는 너무도 편협하고 비겁하고 불의하다. 악과 타협하는 한국교회의 민낯을 보는 것 같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겉핥기식으로 오독한 결과이다. 지극히 개인적 영성과 기복신앙이라는 틀 안에서만 성경을 읽기 때문이다. 사회적 영성의 철저한 결여다.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공적 신앙 4: 평화와 통일의 문제
성경에 많이 나오는 중요한 이슈가 평화와 통일―하나 됨―이다. 구약에서도 평화 곧 샬롬이 중요하고 신약에서 바울은 예수가 곧 평화라고 선포한다.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모든 장벽을 헐고 하나 되게 하셨다고 에베소서는 증언한다. 독일교회는 이러한 신구약 성경의 메시지에 열려 있을 뿐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평화와 통일을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해오고 있다. 오죽하면 그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지대한 관심을 갖겠는가! 인도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독일교회는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 북한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피조세계와의 평화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반면 한국교회는 잘못된 수구 반공 논리에 휩싸여 국민과 성도를 호도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교회가 독일교회처럼 대사회적이고 시대적인 이슈에 제대로 깨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에 진정 깨어 있는 목사가 절실히 요청된다. 


독일교회에서 배울 점

이학준은 한국교회를 결박하고 공적 영성을 저해하는 요소들로 기복주의, 정과 연의 문화로 대변되는 가족주의, 개교회주의, 성장논리와 우상숭배, 교회와 사회의 분리를 초래하는 이분법적인 사고, 이성 경시 사상 그리고 단순논리주의 등을 들었다. 여기에 몇 가지를 추가한다면 잘못된 권위주의, 교회 분열과 세습, 목사의 제자를 만드는 성경공부와 편협한 성경해석, 설교 등이다.  

필자의 20여 년에 걸친 독일 생활과 현지 목회 경험상 독일교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면 독일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이기에 한국교회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가? 공적 신앙의 관점에서 한국교회와 독일교회를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지만, 이 글을 마치면서 간략하게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독일교회는 오랜 역사를 통해 철저히 반성해 왔다. 즉 독일교회는 반성의 역사와 더불어 잘못된 부분을 집요하게 고치며 달려 왔고 그리고 행동했다. 
둘째, 독일교회의 공적 신앙의 역사를 위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 독일교회는 늘 사회적 영성과 책임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경건주의와 디아코니아에 대한 관심, 그리고 히틀러 치하의 제3제국 시절에도 바르멘 선언과 고백교회 운동을 통해 교회가 감당해야 할 대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에 대해 바른 성경 해석과 신학 그리고 행동으로 본을 보였던 경험을 가진 교회이다. 
셋째, 독일교회는 성경을 성경대로 바르게 읽고 해석하고 토론하는 교회이다. 무엇보다 성경을 바르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읽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입과 눈으로만 하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고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읽는다’고 할 수 있다. 

율법서를 읽는다고 가정해 보자. 율법서를 읽으면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힘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계신지 읽을 수 있다. 희년이 율법서에 나타난다. 율법서만 제대로 읽어내도 오늘의 교회가 공공의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예언서 역시 마찬가지다. 예레미야,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미가 등의 예언서를 교회가 제대로 읽으면 오늘날과 같은 참담함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복음서는 또 어떠한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행적과 말씀들을 제대로 읽고 들을 수 있다면 오늘 한국교회가 예수의 길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따를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있다. 

한국교회는 젊은 교회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주일에 교회에 앉아 있는 성도가 적다고 독일교회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자. 주일과 새벽기도에 무수히 많은 성도가 나와 앉아 있다고 마치 한국교회가 대단한 교회라고 말하지 말자. 과연 하나님은 어떤 교회를 원하실까? 

독일교회를 본받아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성경을 읽자. 엉터리 믿음을 훌훌 미련 없이 떨어버리고 성령과 더불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을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실천해보자. 
하나님,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 각주는 인쇄본(통권 제300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주
 

장승익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담임목사로, 세계밀알연합 이사와 ISF 이사, 학복협 중앙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M.Div.)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Dr. Theol.)를 취득했다. 독일 남부지방한인교회 담임목사, 기독교재독한인교회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최근 신학도들과 목회자들, 가나안 성도들을 섬기는 ‘예수 희년과 하나님 나라 연구소’를 열었다. 



*출처 : 복음과 상황 /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433

예수·희년·하나님 나라를 붙들고 살아오다

Posted by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2018.04.04 14:17 교회 소개/칼럼, 인터뷰, 강의


예수·희년·하나님 나라를 붙들고 살아오다

[298호 예수·희년·하나님 나라를 붙들고 살아오다]
[298호] 2015년 08월 26일 (수) 15:45:16장승익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담임목사  goscon@goscon.co.kr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이 말씀은 흔히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공생애 첫 설교라고 하는데, 제 목회철학의 뿌리가 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제 목회철학을 이 말씀에서 가져왔는데,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저의 목회와 삶 그리고 신학을 꽉 붙잡고 놔두지 않는 말씀입니다. 저로 하여금 다른 길, 다른 삶을 살지 못하도록 늘 저를 경책하고 감시하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한마디로 목회와 신학에서 제가 바람피지 못하도록 하는 생명의 말씀이기에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희년, 하나님 나라에 사로잡히다
지나간 제 추억을 회상하며 이 말씀과 제 목회철학에 관련된 오래 전 신대원 시절의 이야기 보따리를 먼저 풀어 놓으려 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대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면서부터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신대원 졸업논문 제목을 금요철야기도 중에 “바울의 묵시적 기독론”으로 정했습니다(당시의 금요철야기도는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기도였지요). 기도하는 중에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이 주제가 그야말로 이후 제 삶과 신학에 꽂혔습니다. 신대원 논문이라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논문에서 예수, 묵시, 종말 그리고 역동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큰 얼개를 이루었습니다. 

신대원을 졸업한 해인 1989년 11월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카이로스에 결혼을 하고 이듬해인 1990년 3월에 독일로 유학을 갈 때도 예수와 관련된 기독론을 좀 더 깊이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아내와 함께 독일로 떠났습니다. 

이러한 제 독일 유학은 마치 물흐르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나마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신학을 하면서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유학 가기 전 들어가는 신학석사과정(Th. M)을 마치지 않고 곧장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대로 저는 결혼하자마자 당시 세계적인 신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었던 신약학자 롤로프(J. Roloff) 교수가 있는 에어랑엔 대학으로 갔습니다. 당시만 해도 에어랑엔 대학은 근근이 옛 명성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참고로 신학에서 말하는 구속사학파가 에어랑엔 대학에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 입학을 위한 어학강좌를 들으면서 동시에 나름 강의도 듣고 기독론과 관련된 커다란 주제들, 예를 들면 역사적 예수, 인자, 성만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등의 주제들이 신약성경 각권에서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지 관심을 갖고 책과 논문들을 그야말로 정신없이 흡입하듯이 읽어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주제들이 너무도 방대하고 복잡하구나 하는 생각이 숨이 막히게 콱 와닿았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제들을 연구했고, 셀 수 없을 정도의 단행본과 연구논문들이 그동안 쏟아져 나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독일에 오자마자 서툰 독일어로 몇 년간 출판된 연구논문들과 주요 단행본들을 탐독하면서 느낀 또 한 가지는, 기독론에 관한 연구는 무수히 많은 반면 교회론에 관한 성경신학적 작업은 상대적으로 굉장히 적다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공관복음서나 요한복음의 기독론에 관심을 가졌던 저는 여기에 착상하여 히브리서의 교회론을 저의 박사논문 주제로 써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 각권의 기독론에 관한 책을 읽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히브리서의 대제사장적 기독론과 구원론에 관한 글들을 읽어나갔습니다. 그리하여 히브리서의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 즉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권면·징계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제사장적 기독론과 구원론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결국 히브리서에서 교회론·기독론·구원론·종말론은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으며,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엮어져 오늘의 히브리서라는 탄탄하고 멋진 신학적 작품을 탄생시켰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박사학위논문을 “히브리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 히브리서의 신학과 교회론을 위한 한 기여”라는 제목으로 썼습니다. 

히브리서를 연구하면서 구약성경 중 레위기를 많이 읽고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 희년에 대해 좀 더 선명한 이해를 갖게 되었고, 이 주제는 제 평생의 신학의 화두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밝혔듯이 신학의 길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는 제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한 더 깊은 영적, 신학적, 목회적 이해는 독일 유학 시절 박사논문을 쓰는 과정과 목회의 현장에서 무르익었고, 그 결과 저의 목회와 신학의 두 기둥으로 확실히 자리매김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 보듬은 예수의 공생애를 목회의 근간으로 삼다
유학과 목회를 포함하여 약 20년 6개월을 독일에서 살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중 제 마음에 깊이 남아 지금도 제 목회와 신학에 자양분이 된 체험이 있습니다. 독일 유학 3년째 되던 해인 1992년 여름부터 1994년 여름까지 약 2년여 간 독일 장애인들을 가가호호 방문하며 돌보았던 일입니다. 어쩌다 독일의 개신교 사회봉사국에 속해 있는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각 지역 단체인 디아코니센터에 속해 그들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약 10시간 정도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들을 방문하며 목욕도 시켜드리고, 집 청소, 시장 보기, 음식 준비, 식사 시중, 산책, 말동무 그리고 때로는 대소변까지 모든 일을 두루 챙기는 사역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고독한 장애인들과 함께한 이 2년 동안의 삶은 저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황홀한’ 경험이었고, 이후 30세에 목사 안수를 받아 목회하며 학위논문을 쓰는 과정에 지대한 도전과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때의 경험과 더불어 예수의 삶과 누가복음 4:18~19절 말씀이 지금도 변함없이 제 심장과 신앙 양심을 울립니다.

독일에서 10년째 목회를 하던 어느 날 복음서를 읽는데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말씀들이 갑자기 제 가슴을 못으로 찌르는 듯 강하게 와서 박혔습니다. 말씀들이 마치 혁명을 일으키며 일어나 제게 다가왔다고나 할까요. 마태복음 4:23~24절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아 그렇다! 이런 예수의 삶이야말로 정말 내가 본받고 따라야 할 목회가 아닌가!’ 하는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눈깜짝할 사이에 교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길로 곧장 장애인 선교사역을 하는 유럽밀알에 전화를 걸어 장애인 선교사역에 참여하는 교회가 되기 원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장애인 선교사역에 음으로 양으로 참여하며 섬겨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는 유럽에서의 제 목회와 신학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쳐 특히 유럽의 장애인들과 소외받는 가난한 이웃들과 나그네의 삶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목회란 오직 예수가 하셨던 바로 그 일을 이어 하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물론 신학 작업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신학 역시 예수의 말씀과 삶을 논리적으로 이 세상에 바르게 전하고 설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 짧다고도, 길다고도 할 수 없는 그간의 제 목회와 신학을 생각할 때, 그 중심에 단연 예수와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가능한 한 예수의 말과 인격 그리고 삶을 본받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성도와 동역자와 가난한 이웃을 대하려고 나름 최선을 다하며 달려왔습니다. 오직 예수의 공생애의 삶, 곧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사회적으로 소외당해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하는 그의 삶이 저의 목회와 삶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사회참여적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온 것은 아니지만, 누가복음 4:18~19절이 지금까지 저의 목회와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줄 같은 말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와 하나님의 말씀을 치열하게 붙잡고 씨름하는 목회자와 신학자의 당연한 목회신학적 과제는 희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저의 분명한 확신입니다.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희년의 근본 취지는 자유와 해방이요,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공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여 은혜받은 우리는 이 받은 바 은혜를 널리 전하고 펴야 할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저는 저 자신에게 수없이 묻고 또 묻습니다. 나는 왜 목회를 하는가? 나는 어떠한 설교를 준비하여 성도들에게 선포하는가? 나의 목회와 설교와 신학을 예수께서 지켜보시면서 뭐라고 평가하실까? 사람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 부요한 목회자요 신학자로서의 길을 오롯이 걷는 것이 저의 소신이요 소망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선포하신 누가복음의 이 설교는 예언자로서, 목자로서,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압축해 놓은 말씀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목회하고 신학하며 설교하고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지닌 모든 목회자와 신학자, 그리고 성도라면, 예수의 이 메시지가 자기 삶에 꿈틀거리고 있는지를 잣대 삼아 살아가면 나름 해답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매일의 물음: 예수의 예언과 목회를 따라 사는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지으셨고(잠 14:31; 17:5), 저들의 보호자가 되시며(시 14:6), 예수의 오심이 먼저 그들에게 있었다면, 교회는 당연히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 선포하고 그들의 형편을 돌아보고 보살피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을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남미를 대표하는 멕시코 작가 올리비아 파스는 시(詩)를 가리켜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를 드러내는”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삶이 그러했다고 봅니다. 시인 정호승은 <시인 예수>라는 시에서 예수를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으로 묘사했는데 정말 시인다운 눈으로 예수의 삶을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시인 예수는 현실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가장 현실적이셨고, 또한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만나고 영원과 찰나가 만난다고나 할까요.

탁월한 구약학자였던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예언자들》에서 예언이란 “인간 상황을 하늘의 눈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은 하늘의 눈으로 인간 실존을 주석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구약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누가복음 4:18~19절은 예언인 동시에 예수의 목회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목회자와 신학자는 이러한 예수의 예언과 목회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예수와 상관없는 목회나 예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와 무관한 목회나 예언은 주술이요 종교행위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의 삶의 본질보다는 뿌다구니에 치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늬만 있고 소리만 요란하여 정작 필요한 복음의 능력과 생명력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뿌다구니에 걸려 넘어지듯 이러한 교회와 목회자의 행태로 사람들은 위로와 희망을 얻기보다는 걸려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그야말로 세상으로부터 남우세를 당할 뿐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러한 것 같습니다. 

오늘 교회의 모습은 정말 믿는 우리에게나 믿지 않는 세상에게도 한시름이 되고 있지 않나 합니다. 이 한시름을 과연 어떻게 덜 수 있겠습니까? 저는 누가복음 4:18~19절의 말씀이 그늘진 곳에 비치는 볕뉘와 같아 낡고 습한 곰팡이를 내몰듯이 오늘의 교회와 사회를 어둠에서 건져내고 치유하는 생명수가 되기를 오늘도 조용히 소망해 봅니다.  


장승익
함께하는교회 예수마을 담임목사로, 세계밀알연합 이사와 ISF 이사, 학복협 중앙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M.Div.)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Dr. Theol.)를 취득했다. 독일 남부지방한인교회 담임목사, 기독교재독한인교회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최근 신학도들과 목회자들, 가나안 성도들을 섬기는 ‘예수 희년과 하나님 나라 연구소’를 준비 중에 있다. 




출처 : 복음과 상황 /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379